세계라는 호수 안의 백조: 나의 외항사 승무원 합격수기 및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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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라는 호수 안의 백조: 나의 외항사 승무원 합격수기 및 체험담


 


언젠가 주말 동안 한국에 놀러 온 친한 일본인 친구가 나에게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왜 사람들은 이틀밖에 안 되는 주말을 위해 나머지 5일을 일해야 하지? 그 반대가 되야 하는 것 아니야?”


그 당시에는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에 있어?”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항상 그렇진 때때로 운이 좋은 경우도 있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직업을 가진 나는 홍콩 최대의 항공사 케세이 퍼시픽의 항공 승무원이다.


 


내가 승무원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 건 어떻게 보면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2008년 봄, 영어 학원에서 학원 강사로 근무하던 무렵, 비슷한 시기에 강사 생활을 하다가 3개월 만에 그만 둔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 그녀의 미니 홈페이지를 방문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중동의 유명한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사진 속엔 내가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안전 교육 훈련에서부터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일과 여행을 병행하는 모습의 그녀가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2년의 회사 및 1년간의 학원 생활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던 차에, 그녀의 직업은 내게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고 이를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승무원의 꿈을 꾸게 되었다.


 


승무원이 되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사실 승무원이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지,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합격을 위한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지원부터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나의 무대포식 기질이 합격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얼마나 경쟁이 심한지 잘 몰랐기에 지레 겁을 먹지 않았고, ‘판에 박은 듯비슷비슷한 지원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과 차별화가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묻지마식으로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간절한 마음과 기본에 충실한 준비, 나는 이 두 가지에 집중했다.


 


기본에 충실한 서류지원 내가 여러 외항사들 사이에서 케세이 퍼시픽을 지원한 특별한 계기는 사실 따로 없다. 내가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시기에 그곳에서 마침 채용 공고가 났기 때문에 나는 입사 준비를 한곳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회사의 공식 웹싸이트를 방문해 회사의 분위기 및 원하는 인재상을 파악하는 일. 당시 웹싸이트엔 마케팅의 일환으로 People Campaign이라고 현직 승무원들의 모습 및 개인의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인상적이었고 또 면접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피지기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고, 상대를 알고 나를 알기에 자신감이 생겼다. 영문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작성 할 땐 최대한 불필요한 말과 표현을 삼가고, 내용의 정확성과 간결함에 중점을 두었다. 며칠 후, 난 면접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1차 면접-그룹 토론: 간단 명료하되 인상 깊게나는 아직도 1차 면접 장소에서 봤던 그 충격적인 광경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마치 성수기를 맞은 놀이공원의 인파만큼 많았던 지원자들... 그 압도적인 숫자에 놀랐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차 면접은 지원자 15명들이 각자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고 나중에는 두 조로 나뉘어 그룹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면접관이 사람 수가 많으니 자기 소개를 1분 안에 간단히 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잘하고 싶은 열의가 너무 강해서인지 주어진 시간 제한을 넘기며 자기 소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일부러 짧고 간단하되 인상에 남게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면접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적기만 했다. 그룹 토론 때도 경쟁심리 때문인지 토론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몇몇이 눈에 띄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두 마디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1차 면접에서 다음 심층 면접으로 가는 초청장을 받은 사람은 15명중 나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다른 남성 지원자, 즉 면접관의 지시를 잘 따랐던 단 두 명 뿐이었다.


 


2차 면접-11 심층면접: 나를 자신감 있게 어필하기– 11 면접, 나를 어필 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밝은 미소와 긍정적인 자세로 인터뷰에 응했다. 면접관은 내 이력서를 토대로 여러 질문을 했다. 왜 승무원이 되고 싶은지, 승무원이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내가 가진 승무원의 자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 사실 이런 식의 예상 가능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나는 키워드를 연상하는 방법으로 준비했다. 만약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모범 답안같이 만들었다면 외우기도 힘들 뿐만이 아니라 막상 실전에서 기억이 나지 않을 위험이 있으므로, 질문에 대한 핵심만을 담은 단어, 즉 키워드를 떠올리며 그 단어를 풀어가는 식으로 대답하는 방법을 사용하니 조금 더 편안하게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다. 물론 예상외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네가 했던 일들 중에 자신의 책임 업무 이상의 일(going the extra mile)을 해야 한 적이 있었다면 설명해봐라는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전 회사의 해외 영업 팀에 근무하면서 국내와는 때로는 정반대의 시간에 맞춰 임무를 완수해야 했던 경험에 대해 얘기했는데 사실 이게 그가 원하는 답이었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했던 건, 나는 보여지고 싶은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있는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2차 면접의 합격이라는 기쁨으로 내게 보답했다는 것이다.


 


2년간의 기다림 - 너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가 싶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2008년 후반기,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 전반에 암운을 드리우자 회사측에서 합격자들의 입사를 무한정 연기 한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낙담한 합격자들, 특히 출국 날짜를 기다리며 다니던 직장까지 관둔 사람들의 경우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나도 이 소식에 힘이 빠졌다. 그렇다고 망연자실해 있고 싶진 않았다. 난 그저 이 일과 나와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생각, 깨끗이 포기(?) 하고 학원 강사직에 충실하며 살았다. 그렇게 승무원의 꿈을 접고 2년 정도 살았을 즈음, 2010년 봄, 그야말로 난대 없이 회사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혹시 아직도 입사를 희망한다면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의향이 있냐고. 나의 마음이 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치뤄진 입사 시험 – 2008년도에 이미 합격했더라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인지 입사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았어야만 했다. 형식은 비슷했지만 예전과 틀린 점이 있다면 다음과 같았다. 먼저 토익 수준의 영어 듣기 및 읽기 시험과 적성 검사를 했는데 듣기의 경우, 비북미권, 즉 영국, 호주, 인도 국가 특유의 억양이 있는 영어로 된 대화문이 주를 이뤘으며 학문적인 영어가 아닌 실질적인 영어 실력을 가늠하는데 초점을 맞춘 듯 했다. 영어그룹 토론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4명씩 두 조로 나뉘어 찬성과 반대 의견을 한 명씩 발표했다. 순발력, 협동심 그리고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험이었다. 11 면접은 예전보다 훨씬 더 길고 자세하게 이루어진 느낌을 받았다. 기내 상황을 그린 그림을 보고 면접관 에게 설명하기, 영어 기내 방송 읽기도 했는데 전자에는 명확한 의사 전달 능력을, 후자에서는 목소리와 발음을 보는 것 같았다. 압박 질문도 많았다. 면접관은 내가 과거에 이직한 부분을 문제 삼아 자사에 입사 하더라도 금방 관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본인이 어떻게 믿겠냐며 자기를 설득시켜 보라고 하기도 하고 내가 한 말에 꼬리의 꼬리를 물어 내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했었다. 중간에 인상을 쓰기도 하고 한숨도 쉬고 심지어 마지막 인사까지 받아주지 않던 면접관의 쌀쌀한 태도에 면접실을 나오는 나의 어깨와 마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스스로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기겠다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8시에 시작해 밤 10시 넘게 까지 진행된 면접 및 서류 절차, 끝없는 기다림은 체력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는데 진짜 승무원의 일상은 바로 이 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합격은 시작일 뿐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몇 년간에 걸쳐 수십 번 지원한 사람도 많다는데, 나는 처음 도전해 바로 합격했기 때문이다. 큰 어려움이나 좌절 없이 얻은 결과이기에, 어쩌면 이 일을 쉽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착각은 홍콩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된 그 날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마치 군대에 입대한 것처럼 하루하루가 전투적이었다고 밖에는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진행되는 강도 높은 수업과 매일 있는 시험... 힘든 일은 비단 교육 뿐만이 아니었다. 신입 승무원으로써의 비행 또한 육체적, 정신적 시험의 연속이었다. 일의 특성상 강도 높은 육체 노동, 시차적응, 건강상의 문제 등을 극복해야 했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동료와 승객들에 대한 이해도 및 포용력을 키워야 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함께 힘든지 고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그곳에서 익숙했던 나의 생활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힘든 만큼 또 보람과 매력이 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부터 호주, 북유럽, 멀게는 북미까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 문화, 음식 및 쇼핑을 접할 수 있는 기회, 타 직군에 비해 자유로운 스케줄과 더 많은 개인시간, 가족까지 누릴 수 있는 할인 티켓, 여성을 배려한 육아 휴직 제도 등 승무원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정말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 이상으로 가치 있는 부분은 바로 세계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나를 통해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일을 통해 근성과 인내심, 겸손함과 성실함을 몸과 마음으로 배운 것도 크나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년 전, 미니 홈페이지 속 외항사 승무원의 사진을 보며 내가 꿈을 꾸었던 것처럼 이젠 다른 이들이 나의 사진을 보며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나 또한 이들처럼 승무원에 대한 환상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호수 안의 백조가 우아해 보여도 사실은 물 위에 떠 있으려 물 아래에서 쉴새 없이 발차기를 하듯, 승무원 또한 화려한 이미지 뒤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승무원 생활을 한지 약 2년이 되가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외항사 승무원을 꿈꾸는 지원자들은 보여지는 이미지에만 현혹되지 말고 정말 승무원이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또 내가 그 일에 적합한지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영어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지원자들에게 나는 판에 박은 듯한 모범답안을 외우기 보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며 기본 실력을 쌓아가길,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신감을 키우기를 권장한다.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고 성실하다고 자부한다. 영어는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나처럼 승무원이란 직업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려는 인재들에게 나의 합격 및 경험담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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