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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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것은 호주를 떠나기 전, 늘 나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갈망이었고, 언젠가 나도 나의 한계, 굴레를 깨고, 새롭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 하늘에 계신 나의 할머니와 부모님께 자랑스러울 수 있는 내가 꿈꾸던 내 자신이 되고 싶었다.


 


2008년 따뜻한 어느 봄날,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서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불행한 삶도 아니었지만 가슴 속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열심히 해보려 노력한 일들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나 성과들을 얻지를 못해서 좌절도 있었고 그 만큼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2008 7월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인생에서 날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줄 영어라는 날개를 달기로 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사람은 직접 그리고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표현을 하기에 언어적 한계는 자신의 지식,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난 이 글을 보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 영어와 그 외 다른 언어들을 익혀서 글로벌 시대에 세상의 다양한 언어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난 영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영어 회화 실력은 겨우 영어로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고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그래서 영어 학원을 등록하고 거의 1년을 다니면서 하루에 최소 8시간은 꼭 영어 공부에 투자하기로 결심을 했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처럼 영어 공부가 나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학원 수업이 없는 공강시간에도 혼자 책상에 앉아서 영어 지문이나 영화 스크립트를 큰 소리로 따라 읽고 유용한 표현들을 익히고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때 시험을 보기 위해 하는 영어공부가 아니라, 정말 실생활에서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있는데 중점을 두고 능동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Reading, Listening을 할 때 유용한 표현들을 익혀서 어떻게 이것을 실제 Speaking 이나 Writing에서 활용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공부를 해왔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을 때 원어민들과 일상 회화정도는 가능하게 되었고, 1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는 영어로 토론을 할 정도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원어민 강사들과는 식사도 먹고 운동도 같이 하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온 Mark라는 나의 동갑 내기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 당시 그 친구는 아프리카만을 남겨두고 세계를 일주 해왔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하는 이유는 아프리카에 갈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그 친구를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28년의 인생을 살면서 아직 한국 외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 그리고 유럽, 남미, 북미, 아시아, 오세아니아 온 세계를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살아온 Mark 와의 만남은 내 삶에 있어서 터닝포인트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공부해온 영어를 어떻게 하면 잘 활용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2009 10,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해외취업 연수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여러 교육 과정이 있었지만 그 중에 내 눈에 들어온 과정은 바로 호주에서 “Aged care” 관련 교육이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영어가 내 인생에서 날개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었다.


호주에서 노인복지와 영어를 공부할 기회를 가지면서 멋지게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나의 전공인 사회복지와 좋아하는 영어를 호주라는 영어권 국가에서 발휘할 기회가! 연수기간 동안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호주에서 펼칠 나의 꿈을 그리며 즐기면서 교육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9 10월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3개월 가량의 국내 연수를 마치고, 2010 1, 드디어 호주 멜번에 상륙하게 되었다. 교육비를 제하고 호주에 내가 가지고 갈 수 있었던 돈은 단돈 200만원. 많은 돈은 없었지만 나에겐 노인복지와 영어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호주에서 17주간 하루 8시간씩 강도 높은 학교 생활 그리고 수업 과제 제출과 영어 공부를 하면서도, 가진 돈이 얼마 없었기에 학교에 가기 전 새벽 3시부터 7시까지 하루 4시간 매일 펍에서 청소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이론 수업을 마치고 마침내 4주간의 실습이 시작되었다. 보통은 학교에서 실습기관과 연계를 해서 학생에게 소개를 시켜주는데, 난 스스로 마음에 드는 실습기관을 찾고 싶은 마음에 Residents가 백 명 이상이고 Branch가 많은 규모가 큰 회사 (교육, 훈련이나 업무 시스템이 체계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집에서 통근 거리가 멀지 않은 시설을 찾던 와중에, 호주에 도착한지 한 달 여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들린 Job Expo에서 알게 된 Mercy Place라는 Aged care facility를 발견하고 그곳 매니저인 Barry와의 인터뷰를 통과해서 실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은 1,2 층의 High care, Low care, dementia unit 뿐만이 아니라 3층에는 Resident에게 최고급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Deluxe unit까지 있는 꽤 규모가 큰 기관이었다.


직원 구성은 정말 다양했다. 호주 직원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특히 인도, 네팔 그리고 아프리카 계까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팀을 이뤄서 일을 하고 있었다.


High care Low care에서 일을 할 때는 그곳에서 지내시는 Residents와 커뮤니케이션이 큰 어려움이 없기에 그렇게 힘든 점은 없었지만, 처음에 Dementia unit에서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 분들과 일을 할 때는 의사소통이 좀처럼 이루어 지지 않아서 때론 힘들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들의 행동이나 심리적 특성, Preferences를 파악하고 나니깐,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도 치매로 돌아가셨기에, 그 분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 때때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려왔다.


 


4주간의 실습기관 동안, 나는 이곳에 일을 배우러 온 학생이라는 생각보다 이곳의 직원이라는 생각으로 Residents 한 분 한 분께 관심을 가지고 그 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곳에 있는 간호사나 Personal carer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며 항상 밝은 모습으로 대하였다. 실습이 끝날 때 즈음에는 그곳의 매니저로부터 Job offer가 왔고 실습이 끝난 뒤에는 그곳의 직원으로서 당당히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학교를 다닐 때 하지 못하던 외식과 쇼핑을 할 정도로 경제적 여건도 많이 좋아지고 앞으로 미래에 대해 불안했던 마음들도 사라졌다. 멜번에서 우연한 기회에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에서 주최하는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여해서 멜번에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난 호주에서 1년을 머무를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공부와 일을 하면서, 호주라는 나라의 환경과 사회 시스템들을 접하면서 살기에 정말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좀 더 지내면서 나의 능력을 키우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었기에 워홀 비자를 1년 더 연장하기로 결심하였다. 체류기간을 1년 더 연장하려면 호주 지방의 1차 산업 (농업, 수산업, 광업 등)에서 3개월 가량을 일을 해야만 신청할 자격이 주어졌다. 지인을 통해서 서호주 Albany라는 곳에 있는 고기 공장 일을 소개받고, 멜번에서 정들었던 친구와 Mercy Place의 친절하고 따뜻했던 동료들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멜번을 떠나기전 Mercy Place의 Manager인 Barry와 함께



               <멜번을 떠나기전 Mercy Place Manager Barry와 함께>


 


 


멜번에서 비행기로 5시간 그리고 퍼스에서 버스로 5시간을 걸쳐서 서호주 Albany라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도시생활과 또 다른 호주 전원생활을 만나게 되었다. 비자를 연장하는 필요조건인 3개월 동안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Aged care 관련 일을 하고 싶었기에 그쪽 일을 알아보던 중, 함께 살던 룸메이트의 추천으로 Baptistcare라는 Nursing home을 알게 되었다.


그곳 매니저와 연락이 닿아서 Resume Cover letter 그리고 관련된 자격증을 들고 가서 제출을 하고 며칠 뒤에 그곳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인터뷰 끝에 매니저가 Reference를 확인하고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인터뷰 결과를 기다렸다. 멜번의 Mercy place에 있는 매니저 Barry로부터 나의 업무 능력에 대한 Reference 확인 뒤에 드디어 최종 합격 통보가 왔다. 평일에는 공장일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주말에만 Nursing Home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것이 피곤할 법도 한데 주말에 Baptistcare에서 여러 다양한 Staffs Residents를 만나는 일이 너무 반갑고 즐거웠기에 밝은 모습으로 기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멜번에 있는 동료들과도 종종 전화나 메일로 안부를 전하면서 인연을 이어갔다. 특히 멜번에 일할 때 매니저였던 Barry와 연락을 하면서, 이 메일로 안부를 물으면서 보낸 Albany에서 나의 생활과 계획에 대한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Mercy Place CEO에게 나의 메일을 다시 전달했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감명을 받고 CEO에게 나의 메일을 전했다는 소식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메일내용1


 


1년 비자 연장을 위한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Nursing Home에서 주에 40시간 이상씩 일을 할 수 있었다. High care, Low care 그리고 Dementia unit등 다양한 unit에 순환근무를 하면서 여러 Residents를 알게 되고 Care를 하면서 기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업무의 폭도 넓어졌다. 크리스마스에 있는 기관에서 주체하는 한 행사에서 Residents를 위해 팝송을 준비해서 Residents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Staffs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많이 숙쓰럽기도 했지만 행사 장에 있는 많은 분 들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많은 보람을 느꼈다.


 


그러던 와중 호주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엔 이곳에서 2년 정도를 지낸 뒤에 한국에 휴가 차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 한국에 있던 여자친구나 가족들이 그리웠고 한국에서 영어실력도 쌓고 나중에 호주에 이민을 하거나 학교를 다닐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IELTS 시험 준비도 할 겸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11 1월 추운 겨울 날, 한국에 와서 그토록 기다렸던 여자친구와의 행복한 재회를 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자친구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떠나간 여자친구 뒤에 가족, 친구들은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그대로였다. 한국에서 5개월 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 가족들을 만나면서, 그 동안의 그리움들을 만남의 기쁨으로 많은 힘이 되었다. IELTS학원을 2달 다니고 5월에 치른 첫 IELTS시험에서 Academic module overall 6.5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에서 꿈만 같던 3개월 정도를 지내다가 이곳 한국 생활에 다시 익숙해지면,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호주로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호주로의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호주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금 준비하였다. 서 호주 Albany에 있는 Baptistcare Manager Clinical care coordinator에게 메일을 통해서 안부를 전하고, 다시 그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얼마 뒤 흔쾌히 나와 다시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게 되어 너무 고마웠고, 그곳에서 정다운 나의 동료들과 다시 일할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메일내용2


 


2011 6월 그렇게 난 나의 꿈을 위해서 다시 호주로 홀로 떠났다.


한국에서 5개월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다시 찾은 퍼스는 변함이 없었다.


도착한 후 몇 일 동안은 호주에서의 지난 1년 동안 공부와 일로 그 동안 좀처럼 해 보지 못한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퍼스 근교에 있는 여러 여행지들을 둘러보았는데, 사막의 풍화작용으로 독특한 형상을 지닌 Pinnacles를 방문하고 근처 사막 언덕에서 Sand boarding도 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특히 인상이 깊었던 일은 Caversham Wildlife Park에서 캥거루와 코알라 등 여러 야생동물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하얀 캥거루와의 만남이었다. 캥거루에게 먹이를 주고 사진을 찍으려는 나에게 한 캥거루가 갑자기 내 볼에다가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볼이 간지럽기도 했지만, 그 캥거루가 나에게 준 키스가, 마치 호주라는 온 나라가 다시 호주로 찾아온 나를 반기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퍼스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찾은 Albany에서 Batistcare 동료들과 다시 만남을 가졌다. 회사에 들어가서 리셉션에 있는 Cathy와 인사를 하는데, 옆에서 Clinical care Coordinator Sue가 나와서 반가워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회사가 조금은 낯설고 다시 시작한다는 초조한 마음이 Sue big hug로 눈 녹듯 사라졌다. 예전에 이곳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는 업무가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동안은 그 기관에 있는 모든 Residents들의 특성과 선호도를 파악하는데 온 힘을 썼다. 특히나 Residents들의 Care plan을 파악하고 그들의 ADLs (Activities and Daily Living), 즉 일상에서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활동 가능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그때 그 때 주려고 노력했다. 같이 일하는 호주 간호사가 나에게 와서 넌 일을 할 때 Residents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느껴진다.”라고 칭찬을 해줬을 때, 내가 그곳에 있는 어르신 분들을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존중하며 그들을 대하고 있음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일상 속의 작은 인사와 소소한 농담에도 미소를 보이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때와 나의 도움으로 인해서 그 분들이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함 없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때론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어르신 분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한 번은 Nancy Tom이라는 결혼 후 6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온 노부부가 계셨는데, 식사도 잘 하시고 나와 농담도 주고 받고 미소를 보이시던 분들이 근무가 없던 하루 이틀 사이에 돌아가신 소식을 접했을 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을 겪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그 노부부의 아들이 그의 부모님을 잃고 유품을 찾으러 기관에 찾아온 날, 그 슬픔 속에서도 나를 보고 평소와 다름 없이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던 중, 그 노부부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고 그 아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I’m sorry for your loss”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참고 있던 슬픔이 복 바쳐서 그도 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로 어르신들을 돌볼 때, 일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그분들을 향한 미소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을 마지막으로 볼 날이 어쩌면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일이 익숙해 지면서 일을 함께 해온 여러 Nurse Carer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온 Maria와 필리핀에서 온 Leo, Julie 등과 많이 친해져서 그들의 생일이나 어떤 이벤트가 있을 때 초대되어서 동료로 서뿐 만이 아니라, 친구로서 서로의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는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여러 Staff들이 모여서 Staff Concert를 준비했는데, Old pop song“You’re my sunshine”을 선글라스를 끼고 여러 어르신 앞에서 부르게 되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앞에 계신 어르신들이 바로 나의 눈부신 햇살이기에, 지금 너무 눈이 부시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선글라스를 끼게 된 이유를 설명하니 모두들 나에게 미소와 환호를 보내주셨다. 약간의 수줍은 듯 과감한 댄스를 선보이면서 어르신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면서 뜻 깊은 크리스마스를 보내었다..


 


또 다른 도전


 


그렇게 일도 익숙해지고 그곳의 Residents, Staff들과도 잘 지내고, 경제적으로 안정도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뭔지 모를 허전함이 찾아왔다.


이곳에서 정말 내가 가진 능력을 모두 쏟아 붇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나 자신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의 온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을 하다가, 한국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관심을 가진 상담분야 중에서 특히 직업상담 분야에 대한 경험을 호주에서 쌓고 싶었다. 한국에서 직업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커리어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있던 중 호주 해외취업 연수를 위해서 일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왔는데, 호주에서 노인 복지 분야뿐만이 아니라, 직업 상담이라는 새로운 분야에도 도전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던 와중 Albany에 위치한 ‘Workforce Development Centre’ 라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고 인터뷰를 보고 그곳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센터의 CEO가 나에게 CaLD (Culturally and linguistically diverse) clients, 즉 영어권이 아닌 언어적 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에서 온 Clients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고용서비스에 대한 프로젝트를 주었다. 호주 정부의 고용서비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것이 많지 않았지만, 나 또한 영어권이 아닌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 왔기에 스스로 다양한 상황들을 가정하면서, 호주에 있는 CaLD clients 에게 필요한 고용서비스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였다. 또한 관련 보고서를 읽고 인터넷을 통해 호주 고용서비스에 대한 리서치를 하면서 그 분야에 대한 여러 정보들과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센터에 있는 Career counselor들의 상담을 모니터링 하면서 다양한 Clients를 만났고, 이를 통해 호주에 있는 여러 직종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해를 넓혀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들 또한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인턴 마지막 날, 센터 CEO와 나의 Supervisor Allan에게 50 pages 가량의 호주 CaLD clients를 위한 고용서비스에 대한 보고서와 그곳 센터에서 시행하면 좋을 것들을 정리한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센터 장과 나를 지도해 준 Allan너의 열정과 노력이 정말 인상 깊다고 칭찬을 하면서 나에게 센터를 위해서 보다 오래 머물면서 함께 해주길 바랬다.


 


안타깝게도 그때 난, 서 호주 Albany라는 곳에서 작년의 기간을 포함해 1여 년의 시간을 보낸 시점이었고, 호주의 조그마한 타운의 조금은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 삶의 변화를 원하고 있었기에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인턴 기간 동안 도움을 준 여러 Staffs에게 감사의 마음을 카드로 전하고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Albany를 떠나 한 달여 간 멜번과 타즈매니아 등지를 여행하다가 서 호주 퍼스로 가게 되었다.


퍼스에서 Nursing home 일 자리를 알아보다가 Agies Group의 기관 중 UWA에서 가까운 Claremont에 있는 한 branch에서 인터뷰 기회가 왔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30~40분 정도의 인터뷰를 마친 뒤 매니저 Ann이 레퍼런스를 확인하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Albany에 있는 이전 근무지의 Manager Mike Clinical care coordinator Sue 그리고 Melbourne Mercy Place Barry에게서 좋은 Reference들을 받아서 어렵지 않게 그곳에 Assistant in Nursing으로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이 기관도 역시 Staffs들의 언어적, 문화적 배경이 각자 다양했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온 Staffs이 많았는데 한국에서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낸 외국인 친구가 바로 아일랜드에서 온 친구라서, 그곳에서 많은 Irish들을 만나서 오래된 친구들처럼 반가웠고 새롭게 시작한 직장이었지만 업무에 금방 적응하고 Staffs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호주 Aged care filed에서 일한지도 어느덧 1년의 경력 쌓여서, 새로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는 직원들에게는 어떻게 이곳에서 하루의 업무가 진행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하고 실제로 보여주면서 교육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처음 호주 멜번에 와서 Aged care facility에서 실습을 하고 일을 처음 시작할 때에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확인을 받고 했던 일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교육하고, 여러 해야 할 일들을 서로 협력하면서 그들을 이끌어 나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니 감개무량하였다.


 


 


 


 


 


 


밥보다 꿈


 


 


2012 6, 어느덧 호주에서 2년간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만료기간이 다가왔다. 학생비자로 전환해서 호주에서 Nursing이나 다른 분야로 공부를 하면서 영주권을 준비를 할 지, 아니면 한국에서 해외취업상담이나 노인복지 쪽으로 취업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나에게는 호주보다 새롭게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2년간의 나의 경험 그리고 호주 고용과 노인복지 분야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꿈이 있었고 또한 호주에서 지내면서 내가 느낀 감흥과 호주의 노인복지 그리고 호주 고용센터인 Workforce Development centre에서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호주나 영어권 국가로 가서 일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내가 가지고 경험했던 것들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호주에서 계속 지낸다면 한국에서 일을 할 때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경제적 수입보다 내가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는 지금 나의 꿈의 가치가 더 크다고 느끼고 확신이 있기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자신이 진정으로 만족하고 위대한 일을 하는 길은 자신이 하는 일이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국 산업인력공단의 해외취업 연수프로그램을 통해서 오게 된 호주에서 지낸 2년 동안, 다른 누군가처럼 의사 혹은 기술자 등 전문직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호주 현지에서 Aged care 자격증을 취득해서 호주에 있는 Melbourne, Albany, Perth에 있는 여러 다양한 Nursing Home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는 Carer로 일을 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온 다채로운 사람들과 함께 한 팀으로서 일을 하고 그곳에 계신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서 도움을 드리는 일은 분명 가슴이 뿌듯한 일이고 그 동안의 소중한 경험과 추억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호주에서의 시간들은 나에게 마치 진정한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과도 같았다


다양한 경험 그리고 다채로운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서, 나 자신을 비우고 또한 채우면서 나 라는 사람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지 이제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영어는 평생 함께 할 나의 친구라는 생각과 좀 더 깊이 있는 이해와 활용을 위해서, 영어 통.번역 공부를 시작했고, 또한 해외취업 직업상담사로서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 직업상담과 심리에 대한 실무과정을 계획중이다. 복지 분야 특히 노인 복지 분야는 개인적으로 많은 애착이 가는 분야이다. 호주에서 노인복지 분야에 일을 하길 희망하시는 분들이 호주에서 일을 하는데 어려움 없이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면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


호주에서의 소중했던 2여 년의 시간 동안의 많은 경험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과 확신이 생겼다.


이제는 지금의 초심으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사람들이 만나서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라는 질문보다는 당신의 직업은 몇 개이냐?’라는 질문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저는 해외취업 직업상담가그리고 노인복지전문가입니다라고.


그리고 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냐고 하면 망설임 없이 호주에서의 2년의 시간이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곳에서 난 진정한 내 자신을 찾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했으며, 떠나기 전 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해외취업 직업 상담가 그리고 노인복지 전문가로 새롭게 다시 비상할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난 나의 가슴속에 그 열정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해외취업은 당신의 꿈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해외에서 새로운 도전과 경험그리고 여러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단순히 색다른 경험이 아닌, 세상과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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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균 (2016-09-08)
이분 연락처나 이메일 알수있을까요..? 제관심분야에 적중하신분이라 조언구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