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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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내 고향 강원도 홍천 같이, 울창한 침엽수 사이로 구름 없는 하늘이 보인다. 조금 뒤, 꺼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향하는 새 무리도 보인다. 그들은 남쪽으로 날아가는 듯 하였다. 겨울이니, 나도 새들처럼 조금 더 남쪽으로, 조금 더 따듯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 같지만, 나는 북쪽으로, 그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San Francisco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3시간 남짓에 위치한 Santa Rosa. 이곳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 Seattle에 닿는다. 나는 이곳 Sana Rosa, 그것도 깊은 산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고향에 온 기분을 느꼈다. 고요한 숲 속에서 나의 공상이 우렁찬 말 울음소리에 깨진다. 서서히 하늘을 향해있던 고개를 돌리니, 8마리의 말들이 눈이 들어온다. 그렇다. 이곳은 내 고향 홍천이 아니다.


 


미국현장1



오늘 아침 나는 5:30분에 기상하였다. 미국에 온 뒤로 일출 전에 일어나기는 처음이다. 장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Richard가 찬바람과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Good morning.”


“Good morning, Richard”.


짧은 인사를 마치고, Richard를 따라 한겨울 아침 산속을 걸었다. 아침산속은 어두워 별로 보이는 것이 없다. 이곳 저곳에서 강아지들이 나와 짖고, 꼬리를 흔들고, 반가움을 표한다. Richard는 강아지 한 마리마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고,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추워서 그처럼 강아지들을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내 손은 그저 주머니 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서둘러 닭장으로 향했다. Richard가 어떻게 닭장우리의 문을 열어 밤새도록 갇혀있던 닭과 오리를 풀어주는지 설명하였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하나 꼼꼼히 눈 여겨 보고, 묻고, 확인했다. 내일부터는 Richard 없이 혼자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리들이 꽥꽥 소리를 내며, 눈앞의 연못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들의 활기참에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리고 우리는 염소우리에서 염소들을 풀어 넉넉히 사료를 주고, 서둘러 다음 장소로 향했다. 15분 정도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니 멀리서 담요를 덮고 있는 말들이 보였다. 추운 새벽에 내 입에서 나오는 입김처럼, 말들이 몸과 콧구멍에서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리차드가 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는 Brandy, 그리고 얼룩덜룩한 말은 Dream. Brandy는 다이어트 중이니까, 사료 반 컵과 건초 한 단만 주면 돼. 저기 멀리 있는 조금한 말은 Buddy인데, 몸이 아파서 사료에 항생제를 섞어줘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우리는 서둘러 사료배식을 하고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말을 한 마리씩 마구간에 집어넣기 시작하였다. 말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정신이 없는 사이, 서둘러 말들이 덮고 있던 담요를 벗기고, 말발굽 청소를 시작하였다. 말의 발목을 잡고 들어, 말의 무릎을 자신의 허벅지에 언고, 솔과 송곳같이 날카로운 연장으로 발굽 사이에 낀 돌과 진흙, 똥 덩어리들을 제거해 주는 일인데, 말들이 무겁고 가만히 있지 않아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다.


 


미국현장2


말 발목을 확실히 고정시켜야 돼, 그렇지 않으면 차이거나, 발에 밟힐 수가 있어. 제대로 차이면 뼈가 부러지니까, 정신 잘 차리고.”


리차드가 아무렇지 않은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산속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추운 겨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땀 범벅이 되었다. 말발굽 청소를 다한 뒤, 조랑말에게 가서 똑 같은 작업을 하고, 우리안과 밖에 있는 말똥들을 청소하니 이미 점심때가 되었다. 그만 산에서 내려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각자 알아서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대부분의 재료들은 손상을 받아 판매가 불가능해져서 기부 받은 캔 제품, 식빵, 라면, 인스턴트 식품들. 처음 보는 인스턴트 식품들을 뒤에 적힌 사용설명서대로 대충 만들어 배속에 집어넣고, 우리는 다시 마구간으로 향했다. 말들을 다시 마구간 밖으로 풀어주고, 말똥을 치우고, 사료와 건초를 배식하고, 물을 길어 수통을 채워놓는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쯤 다시 말들을 우리 안으로 집어넣고, 추운 Santa Rosa의 산속의 밤을 잘 버티라고, 담요를 덮어준다. 리차드는 내려가서 오리랑 닭을 다시 우리에 넣기로 하고, 내가 남아서, 우리가 제대로 잠겼는지 하나씩 확인한다. 산속의 해는 금방 저문다. 일단 해가 지면, 불빛이 없는 이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이 해가지기 전에 모든 일을 잘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와, 벽난로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황급히 살린다. 의자를 끌어와 벽난로 앞에 앉아 장작을 하나 둘씩 넣고 있을 때, 닭장에서 가져온 달걀을 내려 놓으며, 리차드가 라디오를 틀었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12/25. 성탄절. 나는 미국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아기예수가 태어난 장소라고 일컬어지는 마구간에서 일을 하며 보냈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뜨거운 우유를 마 시며 숙소를 한번 둘러보았다.


 


미국현장3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늦게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나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한눈에도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책들과 음악 CD. 그리고 그 위로, 멋진 문양이 새겨진 엽총. 나는 다시 눈을 돌려 벽난로 속 땔감을 바라 보다, 이글거리는 불빛에서 나오는 따스함과 평온한 크리스마스 캐롤에 그만 눈을 감았다.


 


2011 12 20, Austin, Texas


나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한인의 집 화장실 안에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서 뜨거울 눈물이 막을 수 없이 흘러나오고, 헐떡이며 나오는 울음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물을 토해내길 10여분. 나는 마침내 마음을 안정을 찾고 붉어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우리 부모님 나이대의 네 쌍의 부부가 따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얼굴에서는 측은함이 묻어 나왔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하나. 이곳에 가면 한국음식을 마음 것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내가 잠시 동안 함께 머물고 있는 고과장님과 사모님을 따라 한국인 가족 교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잘 차려진 식사를 마치고, 고과장님 내외를 포함한 네 쌍의 부부와 나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들은 한 주 동안 하나님께 감사했던 일들을 서로 주고 받으며 그들의 신앙을 공유하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생각에, 아무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긴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그들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하나 둘씩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젊은 형제 분도 한 주 동안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있으면 같이 공유해요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 얘기나 해봐요, 어디서 온 누구인지. 우리가 Austin에 사는 한국사람들 거의 다 아는데, 형제 분은 본적이 없어서.”


제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고, 미국에는 9월 달에 왔습니다. 미국오기 전에 1년 동안 홍콩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고, 그 뒤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Korea WEST 프로그램이라고, 정부가 주관하는 해외인턴쉽 프로그램을 통해 왔어요. 지난 주까지 뉴욕에서 지냈습니다.”


뉴욕에서 일하다가 여기로 오셨구나……”


아니요, 그 프로그램을 통해 뉴욕에서 4개월간 학교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턴쉽 때문에 몇 일 전에 왔고요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보네, 인턴쉽 구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미국인들도 요즘 인턴 구하기 힘들어 하는데.”


그냥 처음 몇 개월 동안에는 동기부여도 되어 있었고, 열심히 했었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가니까, 동기도 식고, 안 좋은 일도 생기고 해서. 공부 안하고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그냥 지냈어요. 인턴쉽은 제 J-1 비자를 지원해주는 스폰서에서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길래? 뉴욕이 무섭고 위험하다고 해도, 홍콩에서 1년 살았으면, 외국에서 처음 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서로를 모른다는, 그리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저녁을 얻어먹은 미안함 때문인지, 나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모든 것의 시작은 내가 항공항공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홍콩 교환학생을 준비하고, 발탁 되면서 시작 되었다. 2009, 한국항공대학교 국제문화교류팀에서 근무하시는 강창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가 홍콩이공대학교 교환학생 지원 차 방문했을 때였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서류 준비작업등으로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때로는 이태원에 가서 같이 술 한잔 할 정도로 가까워 지게 되었다. 내가 미래에셋 장학지원에 떨어졌을 때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고, International Summer School WEST Program을 내게 추천해 주시고 그 준비를 도와주신, 그리고 내가 편의점에서 일할 때, 매일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을 알고, 자신도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좋아한다고, 학교로 싸가지고 오라고 하셨던 강창희 선생님. 나를 그냥 제자가 아닌, 시골에서 올라온 동생같이 대해주셨던 선생님의 죽음을 전해들은 것은, 내가 WEST Program을 통해 미국에 온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New York에 온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New York에서의 생활 대해서, 그리고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를 전할 겸, 메일을 선생님께 보냈고, 조심이 잘 지내라는 답장을 선생님께 받은 지 1주일 만에, 친구로부터 선생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그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일 뒤로는, 지하철 안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학교 수업 중에 책상에 앉아 칠판을 볼 때도, 난 그 이유만 생각했던 것 같다. ‘? 선생님이……’ 친구들과 웃고 장난을 칠 때도 조차, 난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상한 건, 내게 이렇게 슬픈 일이 일어났지만, 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슬픈 영화를 봐보고, 이것 저것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 동안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채찍질 하여, 힘들다고 말하지도, 아프다고 슬프다고 소리칠 수 없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동상이 되어 버린 듯 했다. 내 자신이 불쌍했다. 뉴욕에서의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뉴욕에서 어학연수 기간이 끝나가고, 같이 뉴욕에 왔던 동기들이 하나 둘씩 인턴쉽을 구해갈 때쯤, 오스틴, 텍사스에 위치한 반도체자동생산라인 설비업체에서, 내게 인턴쉽 제의가 들어오고, 숙소와 차, 그리고 월 2000불의 좋은 조건에 고민 없이 그 인턴쉽을 선택하게 되었다. 인터뷰에 합격하고, 일주일 내로 Austin으로 와달라는 요청 때문에, 부랴부랴 룸메이트에게 말을 해 집을 취소하고, 학교를 마치고, 나는 오스틴으로 날라갔지만, 그 인턴쉽 업체에서 계약조건을 갑자기 불법적으로 바꾸면서, 내가 그 인턴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회사에 찾아갔다가, 사장에게 안 좋은 소리까지 듣고 난 후, 난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회사를 걸어 나왔다. 나의 첫 번째 인턴은 그렇게 끝났다. 이로 인해, 나는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도 짐을 싸 나와야 했고,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 알처럼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내 사정을 알고 있는 회사 HR담당의 고과장님이 자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잠시 동안 머물 수 있게 해 주셔서, 난 그곳에 잠시 신세를 지게 되었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과장님 내외를 따라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홀려, 그 가족교회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이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내이야기를 담담히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강창희 선생님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내 목소리의 이상한 떨림이 생겼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었고, 그 이야기가 내 떨리는 목소리로 내 귀에 들리는데, 순간 선생님께 죄송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막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 내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던 것이었다.


 


난 그렇게 고과장님 댁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다. New York에서 Austin으로 부친 짐은 도착예정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고, 한국과 다르게 소포 추적을 신청하지 않으면 소포가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된 어수룩한 나는 몇 번이나 우체국에 전화를 했지만, 내게 되돌아 왔던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나는 소포 받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짐의 반을 잃어 버렸다.


 


고과장님께서는 얼마든 머물러도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서둘러 다음 인턴쉽을 구할 때까지 돈 안들이고 머물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인턴쉽을 구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룸메이트를 구해 지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고과장님 댁에서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뉴욕에서 Thanksgiving Dinner를 통해 만난 West Program 6기 친구의 도움으로 Santa Rosa에 봉사활동을 하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목장을 찾게 되었고, 크리스마스 이브날 비행기와 버스를 갈아타고 이곳 Santa Rosa 산속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미국현장4


 


2011 12 26.


또 다른 봉사활동 지원자 Jon이 부모님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목장에 돌아 왔다. 185cm이상의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내 나이대의 백인 청년 이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미식축구를 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 와인 산업에 관심이 있어, 그 쪽으로 유명한 Santa Rosa에 와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있으며, 숙식비를 아끼기 위해 이곳 목장에 머물고 있는 친구였다. 산속에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다 보니 금새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목장에서 일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서로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항상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고, 우리의 대화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


“Hoony(내 영어이름), I know you spent Christmas here by yourself. And… are you going to be here for New Year as well?”


“No idea. What about yourself, Jon?”


“I am going to San Francisco for New Year Party. Some of my friends are coming too. You can always join us. You are more than welcome. I can give you a ride to San Francisco and we can find a cheap hostel there. To be honest, I am sick of horses.”


이곳에서 일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진심이 섞인 농담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Jon도 나를 따라 크게 웃었다. 12 31, 우리는 목장 주인인 RichardLinda에게 잘 이야기를 하고, 산속을 나와 San Francisco, 그리고 인터넷과 전화가 되는 문명의 세계로 들어오는 금문교를 건넜다.


 


우리는 San Francisco에서 가장 저렴한 SF International Hostel에 거처를 정하였다. 며칠 뒤, 호스텔에서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구인 공고를 보았다.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습니다.’ 무조건 반사처럼, 내 이력서를 들고 호스텔 매니저를 찾아갔다.


 


나는 솔직하게 내 사정을 이야기 했다. 머물 곳이 없고, 일본어를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청소든 뭐든 할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시켜 달라고. 그리고 나를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준 건, 대학재학 동안 받은 4년의 장학금도 아니고, 교환학생 당시 준비한 토플점수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2년 동안 군대를 갔다 왔다는 점이 매니저의 마음을 돌렸다. 반세기 분단의 역사가 내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혜택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호스텔 천장에 붙어있는 화재 소방용 파이프를 사다리를 타고 닦았다. 일주일 동안 호스텔에 있는 파이프를 다 닦으니 화장실 청소를 맡겨서, 여자 샤워실 이랑, 공용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 대가로 나는 공짜로 호스텔 4 1실에 존과 함께 머물게 되었다.


 


이 호스텔 4 1실에 머물면서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배낭여행객들을 만났다. 영어를 몇 마디 못하지만 씩씩하게 여행하고 있는 한국인, 브라질에서 6명의 대학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배낭여행객들. 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배낭객은 독일에서 온 Felix였다. 처음 먹어본 신라면을 한국인 보다 더 잘 먹던 독일인. FelixCanada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Seattle을 거쳐 San Francisco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남부와 동부로 여행을 계획 중이었다.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친구라 그런지 그는 항상 징 박힌 벨트를 하고 다녔다. 독일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보컬이 랩퍼인 밴드라는 독특함과 일렉트로닉 기타 소리가 매력적인 그들의 음악이 나는 좋았다. 함께 San Francisco를 여행하면서 1주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나는 302호에 남고, Felix LA로 떠났다.


 


나는 WEST Program 참가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에 내 이야기를 올렸다. New York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Austin에 인턴쉽 차 갔다가 잘 안돼서, 지금 San Francisco에 호스텔에 머물고 있으며, 급하게 인턴쉽을 찾고 있다고. 내가 올린 포스트를 보고 나에게 쪽지가 하나 둘씩 날라오기 시작했고, 그 중에 나와 비슷한 전공을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포워딩 업체에서 일차구직 이후 이차구직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나와 비슷한 처지었다. 그는 해운회사에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인터뷰가 예정된 회사가 있었다. 나도 이 계기로 해운회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내가 원하는 해운회사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Santa Rosa에서 만나, 그 동안 호스텔에서 함께 했던 존이 California에 있는 친척분과 연락이 돼서, 그쪽으로 떠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알게 모르게 그에게 정이 많이 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목장에서 함께 일하고, 같이 밥 먹고, San Francisco를 함께 여행하면서, 우린 내세울 것 없는 불안한 처지였지만, 웃음이 항상 우리와 함께했다. 조만간, 자신이 와인 쪽에 취직만 되면, 자기가 월셋방을 구할 예정인데, 얼마든지 와서 지내도 된다고 존이 내게 말했다. 그 말이 내 고막을 지나 심장으로 전해졌다.


 


어느덧 San Francisco에서의 생활이 1달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존이 배속에서 오래가기로 강력 추천한 피넛버터와 식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점심에는 호스텔에서 밥을 해서, 김치, , 달걀프라이로 배를 채우고, 그리고 저녁때는 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친구에게 얻어먹거나, 홍콩에서 교환학생 시절에 만났던 친구 Irene의 집에 가서 눈칫밥을 먹어가며, 나름대로 아껴 쓴다고 쓰면서 버텼는데, San Francisco의 고물가에 내 주머니는 메말라, 갈라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1월이라, 휴가철에 속한 많은 회사들이 언제 인턴쉽 지원에 답장을 보내줄지, 내가 언제 인턴쉽을 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2달 이상 무직인 상태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나에겐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Santa Rosa의 목장의 정보를 주었던 친구에게 다시 연락하여, New Orleans, Louisiana에 있는 또 다른 봉사활동 장소를 알게 되었고, 나는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3주치 적은 금액의 숙식비를 내면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얼마든지 먹고 자고 할 수 있다는 점. 내가 인턴쉽을 찾을 때가지 지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쪽에서 지금 봉사활동 가능하다는 이메일을 받자마자 나는 주머니에 돈을 털어 New Orleans행 비행기표를 샀다.


 


비행기표를 사고 2틀 뒤쯤, 내 미국생활의 비자를 지원해주고, 인턴쉽을 연결해주는 스폰서의 도움으로 Houston, Texas에 위치한 해운회사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전화인터뷰를 하고 나서 바로, 그토록 풀리지 않던 나의 인턴구직이 확정되었고, 그쪽에서 빨리 인턴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스폰서를 통해 전달했다. 하지만, 내가 New Orleans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되어 있다고 말하고, 인턴쉽의 시작을 2주일 정도 연기 하였다. 사실 주머니에, San Francisco에서 Houston으로 갈 새 비행기표를 다시 살 돈이 없었다. 그날 밤, 난 호스텔 매니저를 찾아갔다. Houston에 인턴쉽을 구했고, New Orleans로 떠나게 됐다고 말했더니, 그 동안 호스텔에서 일을 잘해줘서 고맙다며, 비행기 타는 날 아침에 자비로 공항택시를 불러주겠다고 그가 내게 말했다. 예상 밖의 그의 말을 듣고, 내 두 눈이 뜨거워 졌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뚫고 나오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난 있는 힘을 다해 두 주먹을 쥐었다.


 


2012 1 24, New Orleans, Louisiana.


Luis Armstrong Airport에서 택시를 타고 40. New Orleans 외지에 위치한 이곳은 2005년도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파손된 집을 다시 복구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였다.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거쳐간 것이 벌써 7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서지고, 폐허로 변해버린 집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피해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막노동을 했다. 벽을 허물고, 나무에 대못을 박고, 건축 폐기물을 나르고. 나름대로 건장한 청년이라 자부했던 나에게도 고된 일이었지만, 여성 봉사활동 참가자들도, 무거운 벽돌을 나르며 똑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난 이점이 맘에 들었다. 벨기에에서 정원사를 하다가 온 친구, 독일에서 대학에 다니던 친구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뜻을 가지고 이렇게 모여,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New Orleans에 온지 5일째 되던 날, 나를 포함한 일행 3명은 트럭을 타고, 새롭게 짓고 있는 집에 잠시 들려, 필요한 연장을 챙겨 다른 장소로 이동할 계획 이였다. 연장을 챙기기 위해 일행 중 한 명이 트럭에서 내려 공사중인 집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주차된 트럭 옆에서 선반 위에 고정된 전기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던 독일에서 온 여성 봉사활동 참가자에게 인사를 했다. 짧은 인사가 오가고, 그녀는 다시 전기 톱 위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피가 난자한 전기 톱 옆에서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나약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톱에 중지와 약지가 각각 3분의 1정도가 절단 되었다. 구급차가 와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구를 데려갔다. 구급차가 떠난 후, 모두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밤,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매니저에게 내가 Houston에 인턴쉽을 구하는 바람에 3주 동안 머물려던 계획 대신 1주일만 머물게 됐고, 그전에 지불한 숙식비에 2주일 치를 환불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숙식비는 기부금처럼 여겨지므로 환불하지 않는 규칙이 있었지만, Houston행 버스표와 당장 Houston에 머무를 최소한의 돈이 필요했기에, 나는 매달리듯 사정하였다. 다음날 아침 다른 봉사활동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주머니 속에 있는 버스표를 만지 작 만지 작 하며, 난 문을 나섰다.


 


9시간의 버스를 타고 New Orleans에서 Houston에 도착하였다. 200명이 넘는 해운회사 사원가운데 5명 남짓한 한국인 직원들 중 한 명이 나를 처음 보고, 눈에 독기가 서려있어 북한에 온 줄 알았다며 농담을 던졌다. 나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MSC라는 이 해운회사는 세계 2, 미국 내 1위의 해운회사이다. 전세계에 지부가 있는 거대한 인터내셔널 기업으로, 인턴인 내게 매달 2000불을 지급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던 이유는 그 돈과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갈 데 없던 나를 받아준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어서였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 누구보다도. 그리고 어느 날 MSC Houston지부 사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Hoony, we like you a lot. We want you to stay after the internship”


사장실에서 나오면서, 난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머릿속에는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2012 8, Colorado.


내 옷과 신발은 모두 젖어 있었다. 거세지는 비바람과 짙어지는 안개에 길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번쩍임과 동시에 천둥 소리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바로 옆이다.’ 난 직감할 수 있었다. 겁에 질려 빠름 걸음을 재촉하기를 30, 거짓말처럼 비구름과 안개는 사라지고, 다시 늦여름의 해가 자신의 절정을 과시하며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에, 히터처럼 연신 뜨거운 공기를 토해내던 허파의 열기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날씨가 사춘기 기분마냥 변덕이 심한 Grand Canyon, 그리고 그 Grand Canyon정상에서 시작하여 Colorado강을 찍고 다시 Grand Canyon정상으로 향 한지 9시간째. Grand Canyon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레인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년 250명의 등산객이 사망하는 이 등산코스를 일주일의 휴가를 받아 찾아온 이유는, 그 동안 한국에서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내 과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붉은 모랫길을 오르며, 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 WEST Program을 통해 미국에 온 뒤, 나에게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남들은 생고생이라 단언할 만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 때문도, 2년간 군대에서의 경험도 아니었다. 그건 초등학교 3학년, 허클베리핀을 읽고 가졌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모험을 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작을 즐거움. 그리고 이 모험 동안 흘렸던 진한 땀과 그 뜨거웠던 눈물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청춘의 깨우침. 이 각성이 험난한 여정 동안 날 한없이 행복하게 했다. 이 행복감만으로 난 WEST Program에 끝없이 감사하며, 그 보답을 약속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WEST Program을 통해 미국에 온다고 하여 나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 같은 WEST 후기를 소설 형식을 빌려, 써 내려간 이유는, Program을 통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경험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당신의 한계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아리의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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