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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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해외봉사
코이물고기
박수민 [미국 / 캠필 봉사활동]
일본에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코이물고기는 어디에서 자라는지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어항에선 5~8cm 정도 자라지만 연못에서는 25cm, 강물에서는 120cm 이상 자랄 수 있다. 인간 역시 자신이 활동하는 세계의 크기에 따라 피라미가 될 수도 있고 대어가 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크기인지 생각해본다.
2007년,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에 흥미를 느껴 야심차게 교육학을 전공으로 삼아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이론을 배우는 것에 지루함을 느꼈고 그렇게 어영부영 3년을 흘려보냈다. 2010년, 나는 아무런 목적과 목표가 없는 무의미했던 생활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캠필(Camphill)에 대해 알게 됐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떠나다
캠필은 전 세계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로서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독특한 단체였다. 나는 이곳을 내 삶의 터닝 포인트로 삼고 싶었다. 지금껏 내가 배운 지식과 이론을 활용해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도우며 내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캠필에 대한 열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마음과 달리 캠필에 가는 준비과정은 상당히 버거웠다. 대기업이 주최하는 봉사활동과 달리 캠필을 가기 위해선 중개인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한동안 관련 카페나 경험자들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는 등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는 여러 캠필 중 청소년장애인이 모인 미국 트라이폼(Triform)이라는 곳에 흥미를 느꼈다. 청소년 장애인이 많이 모인 트라이폼에서는 내 또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내 지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 주에 위치한 트라이폼은 한국과 시차가 13시간이었기 때문에 트라이폼 본사와 직접 연락하며 1년 과정의 ‘코워커(Co-worker)’라는 자격을 받기까지 9개월이 걸렸다. 돌이켜보면, 2주 간격으로 답장이 오는 이메일부터 6달 뒤에 치른 전화 인터뷰까지, 준비의 모든 것이 인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과정은 진심으로 트라이폼에 가고자 했던 나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어쨌든 나는 내 삶의 변화를 위해 그렇게 어항에서 연못으로 헤엄쳐갔다.
8월부터 1년간의 트라이폼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활방식은 간단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여러 집에 모여 살며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 방식이다. 나는 로완(Rowan House)에서 생활했다. 로완에는 책임자 역할을 했던 바이소네트 부부와 펜실베니아에서 온 데이비드, 멕시코에서 온 키렌, 뉴욕에서 온 숀과 에릭이 함께 살았다.
원활한 소통을 위한 영어실력은 미리 준비해야
트라이폼에 가기 전 내 나름대로의 영어 준비를 했지만, 현지영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처음에 많은 이들이 모여 이야기할 때 말들이 너무 빨라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할 때 그 자리에서 나는 ‘그림자’가 됐다. 난생 처음 느꼈던 그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단지 준비가 부족했던 나의 잘못이었다.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 산에서 누가 계속 외칠 수 있겠는가? 이곳은 나의 영어실력을 이해해주고 맞춰주는 어학연수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돕는 봉사활동이었기에 나에 대한 ‘배려’를 바랄 순 없었다.
진정한 소통과 교감을 하는 코워커가 되기 위해 나는 6개월간 한국 관련 미디어를 피하고 책읽기와 문법 그리고 CNN 시청 등으로 소통을 위해 공부했다. 밤에도 영어를 들으며 잘 정도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내 영어실력은 점차 늘었고 9개월쯤 지났을 때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다. 야구선수 이승엽이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 말처럼 그때의 나는 현지인들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결과론적으로 트라이폼의 생활은 나의 영어실력에 상당히 좋은 도움을 주었다. 나 스스로 언어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문제지의 ‘정답’이 아닌 실생활의 ‘활용’을 위한 생계형 영어를 하게 했다. 그 곳에서 다진 영어는 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교감하게 한 ‘가교’ 역할을 했다. 분명 해외활동은 효과적으로 현지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러한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필수가 돼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준 소중한 친구 에릭
장애를 가진 많은 친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에릭이다. 에릭은 태어날 때 분만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어 외모가 많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사람은 거부감이 들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나 역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놀랐다. 에릭은 FX증후군을 가진 19살 미국친구다. FX증후군이 무엇인지 잘 몰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기도 하고 바이소네트 부부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상당히 희귀한 병이어서 정보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어쨌든 에릭은 스스로 생활하기 불편하여 나는 매일 그와 함께해야만 했다. 매일 아침 소변으로 젖은 에릭의 이불시트를 교체하고 샤워시킨 뒤 밥을 먹으며 내 하루를 시작하였다. 에릭과 나는 베이커리에서 함께 빵을 구웠고 그것을 마을 각 집으로 함께 배달을 했다. 일과가 끝난 후, 나는 에릭을 씻기고 가끔 동화책을 읽어주며 그를 재웠다.
에릭을 통해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그와 함께 쿠키를 만들었는데 모든 친구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며 스스로 마을을 돌며 배달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에 트라이폼 사람 모두 그를 사랑했다. 나 또한 매일을 에릭과 살을 부대끼며 살았기 때문에 그의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자연스레 에릭의 외형보다 그의 내면을 보게 됐다. 그렇게 에릭은 내 사랑스런 동생이 됐다. 매일 아침 에릭에게 옷을 입히며 “You’re my brother, right?”라고 물으면 Eric은 밝게 웃으며 “Yes, Sumin!”라고 답했다. 돈독했던 우리의 우정으로 에릭의 부모님은 손수 한국요리를 만들고 거기다 한글로 요리이름을 써서 보내주는 등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선물하셨다.
지금도 한국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에릭의 사진을 보며 미소 짓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여전히 에릭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잊을 수 없는 동생이고 내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연필과 머리로 배웠던 이론을 현장에서 활용하다
멕시칸 친구 키렌은 명상이나 그림 그리기만을 좋아하는 정적인 취미를 가진 장애인 친구였다. 어느 날, 그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키렌의 전문의로부터 과체중이어서 건강을 위해 체중조절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키렌에게 가벼운 걷기나 조깅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언제나 “NO!”였다.
그의 건강을 위해서 키렌을 운동시키고 싶었던 나는 대학교에서 배운 교육학 이론인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를 활용해 그를 변화시켰다. 운동을 싫어하는 키렌에게 운동을 하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줬다. 예컨대, 함께 운동을 하면서 공놀이를 하거나 운동이 끝나면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주는 등 운동은 긍정적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매일 저녁을 먹고 함께 캐치볼을 하며 재밌는 이야기를 하거나 멕시칸답게 따뜻한 걸 좋아하는 키렌을 위해 운동 후 함께 사우나를 하는 등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약 3개월 동안 꾸준히 키렌에게 적용한 결과 나는 처음으로 먼저 “I want to walk after dinner”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노력으로 6개월 뒤 키렌의 건강이 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그의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고 고향인 멕시코에 초대까지 받게 됐다.
키렌과의 경험은 한국에서 책상에서 연필로 그리고 머리로만 배웠던 이론과 지식을 현장에서 직접 적용하여 한 사람의 긍정적 변화를 경험한 행복한 ‘사건’이었다. 이후, 나는 많은 장애인 친구들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하려 노력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껏 우리가 만든 기준으로 ‘정상인’, ‘장애인’을 구분하며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트라이폼에서는 그러한 구분 자체가 필요 없었다. 그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언제나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였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트라이폼을 통해 나는 건강한 사회란 사회 구성원들이 부족함을 서로 메워주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됐다.
해외에서 활동하면 누구나 대한민국 대표선수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추석을 맞아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우리 문화를 선보이려고 계획했다. 송편, 떡볶이, 불고기와 같은 한국요리를 대접하고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준비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살던 허드슨 시에는 한국마트가 없어 요리를 위한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운전하여 뉴욕 주인 알바니까지 가서 재료를 사오는 등 우리의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즐거워했고 이후 매주 수요일마다 각 나라의 전통음식을 선보이는 행사가 시작됐다.
그 해 겨울, 트라이폼이 새롭게 홈페이지를 개편하면서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나는 트라이폼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전했고 이를 좋게 본 담당자는 나를 한국인 대표 코워커로서, 수기를 올리고 인터뷰 동영상을 찍는 기회를 줬다. 또한 나는 홈페이지의 한글 번역을 도왔다. 트라이폼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정보가 오르게 됐고 내 인터뷰 동영상은 유튜브에 업로드 됐다. 이는 트라이폼 역사상 최초였다.
이후, 트라이폼에 대한 한국인 지원자가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얼마 전 한국인 지원자가 내 동영상을 보고 힘을 얻었다며 감사하다고 직접 연락을 했을 때 내가 누군가의 꿈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활동할 당시 트라이폼의 현지인에게 한국은 ’한국전쟁‘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을 만큼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브랜드가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해외 코워커보다 더 노력했다. 개인에 중점을 두는 외국문화와 달리 우리와 같은 공동체를 우선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려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현재 트라이폼은 한국인 봉사자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갖게 됐고 다른 국적의 봉사자보다 한국인봉사자를 우선 채용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봉사는 어항 속의 나를 꺼내준 소중한 경험
1년간 트라이폼 경험을 단 몇 장으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분명한 건 그곳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의 나는 180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가도 나와 생김새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소중한 삶이 있음을 알았고 내가 가진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해외활동을 가며 내가 누린 많은 것들을 보답하고자 지금은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봉사와 한국을 찾는 해외여행객들을 위한 전화 영어통역 활동을 하는 등 작은 재능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며 살고 있다. 또한 트라이폼에서 교육의 힘과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변화시키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해외봉사활동은 편견과 같은 어항 속의 내가 연못에서 뛰놀게 하고 강물 속에 헤엄치는 도전을 할 수 있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6개월간의 준비 역시 힘들었지만 그러한 노력을 하기에 충분했던 값진 경험이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청춘들이 해외활동을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Let’s go!”라고 답하고 싶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마음과 상응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Profile
박수민은 미국 뉴욕 주 트라이폼에서 캠필 봉사활동을 마치고 현재는 지역아동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1년간의 트라이폼 생활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영어를 배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노력 역시 값진 경험이 될 것이라며, 혹시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떠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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