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뉴욕을 무대로 능력을 펼치다

작성자
K-Move관리자
조회수
14,961

장려상 / 해외취업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뉴욕을 무대로 능력을 펼치다


 


 


 


윤지은 [미국 / NYC G사]


 


 


 


나는 현재 뉴욕에 있는 식품회사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미국에서 회사 다닌다고 하면 다들 내가 굉장한 스펙을 갖고 있거나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줄 알지만 사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와 지방대학교 출신이고, 학점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영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내가 어떻게 뉴욕까지 와서 능력을 당당히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와 같이 학벌이 좋지 않아 취업에서 좌절하고,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진로를 고민 중인 청년들에게 내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교 진학률은 80%나 된다고 한다. 과연 이들 중 자신의 진로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나 또한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보고 적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성적에 맞춰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유를 얻은 기쁨에 취해 매일같이 노느라 출석률에 신경 쓰지 않았고 당연히 학점 관리도 소홀히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은 흘러 대학교 4학년이 되었고 동기들은 하나 둘씩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러다가 ‘나만 취업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공부를 등한시 했던 나는 학과에서 진행하는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 한 채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통사정을 해 재시험을 5번이나 본 후에 간신히 대학교를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전공이 일반 사무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력서도 받지 않았고 어렵게 면접 기회를 잡아도 돌아오는 질문은 항상 비슷했다. ‘이 대학교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학점이 지나치게 안 좋네요?’ 이것은 곧 나의 불성실한 학교생활에 대한 따끔한 질타였고 그 때마다 스스로 지난 과거를 후회해야만 했다. 결국 아버지와 상의 끝에 취업은 잠시 미뤄두고 취업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었다. 남들은 학교 다닐 때 이미 준비를 마친 토익점수를 따고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덜고 동기들에게 뒤쳐진 것 같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죽기 살기로 공부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우선 강남에서 유명하다는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기초반부터 수강하기 시작했는데 ‘명사, 동사, 형용사’의 의미도 모를 정도로 워낙 기초가 없어서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다행히 그 건물에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카페가 있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줄곧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대부분 방학을 맞이해 한국에 온 유학생이거나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와서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한 친구들이었다. 이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면서 서서히 영어에 대한 공포증은 사라졌고, 그들에게 전해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여러 인종이 살기 때문에 의외로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거나 “미국은 학벌보다 경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는 말에 자신감을 얻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만이 낙인처럼 따라다니던 ‘지방대학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론은 실무경험을 앞서지 못한다


우선, 돈을 벌기보다는 경력부터 쌓자는 생각으로 한국에 있는 유명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무급 인턴을 시작했다. 외국인 손님들도 많은 편이라 비즈니스 영어도 배울 수 있고 미국에서도 꽤 인지도가 있어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당시에도 영어를 잘하진 못했지만, 외국인 손님이 오면 내가 먼저 가서 친절하게 응대하고 선배들의 잔심부름까지 도맡아했다.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실기 수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료 작성은 잘 하는 편이었다. 일반 문서부터 홍보 전단 등 모든 자료가 내 손을 거쳐 갔다. 가끔은 “공짜로 일하는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닌가?“라는 불평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참으로 열심히 했다. 나에 대해 일도 잘 하고 사회성이 좋다는 평이 이어졌다. 그리고 인턴이 끝날 무렵 한 VIP 고객을 소개받게 되었다. 대기업 인재관리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그분의 소개로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운 좋게도 그 기회를 통해 한국에서 꽤 규모가 큰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해외 지사에 정기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송금해주고 어떤 출처로 사용 되었는지 자료를 분석해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큰돈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어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경험이 많은 동기들에게 도움을 받고 혼자 야근도 하며, 불필요하게 지출된 금액을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대학 동기들보다 연봉이 많았던 만큼 스트레스도 많았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인사평가 때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학벌이 좋지 않았고 공채로 입사한 것도 아니라서 진급에서 항상 밀리다 보니 나중에는 후임이 나보다 더 많은 연봉을 가져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회사에서 학벌과 배경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싶은 마음이 강해질수록 미국취업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 학원으로 가서 매일 영어 수업을 들었고, 주말에는 직장인 영어 회화 동호회 활동을 하며 부지런히 해외취업 정보를 수집했다. 미국에 한 번도 안 가본 애가 미국 회사에 다닐 거라고 하니까 모두가 허황된 꿈이라고 포기하라고 했다. 너의 수준에 이만한 회사에 취직했으면 잘한 거라고,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가라고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 딸이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하도 안 해서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큰 꿈을 갖고 열심히 사는 게 내게 큰 기쁨이다”라며 응원해주셨다. 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에 가게 되더라도 혼자 남게 될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적금도 들기 시작했다.


근무한 지 3년이 되던 해,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뉴욕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력서를 보냈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마침 회사 대표가 한국으로 출장을 오게 돼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면접을 본 지원자가 나 말고도 몇 명 있었다. 모두가 해외 거주 경험이 있어서 나보다 의사소통에 능했다. 하지만 나처럼 실무 경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보다 영어 질문에 뛰어나게 대답하지는 못하였지만 평소 준비하던 대로 무난하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그동안 업무를 진행하며 직접 작성한 자료를 보여주면서 실무에 바로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세워라


얼마 후 미국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실무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관문이었던 비자 인터뷰까지 합격하고 대사관을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횡단보도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내 인생에 처음 맞이하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혼자서 마음고생 하며 수년간 준비한 꿈이 이루어졌다는 기쁨과 그 성취감에 그렇게 한없이 울었다. 일주일 후 집으로 여권과 비자가 도착했고 그동안 모아둔 적금으로 비행기 티켓도 사고 뉴욕에 집도 구했다. 퇴직금은 아버지께 선물로 드렸다.


나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계획대로 아버지께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오직 내 힘으로 꿈에 그리던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다. 시차 적응을 할 새도 없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출근해야 했는데, 영화에서만 보던 뉴욕 지하철을 타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타임스퀘어를 걸으며 벅찬 마음이 들었다. 사실, 미국에서의 생활도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회사에서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회의가 중단되기도 하고, 고객의 불만이 접수되기도 했다. 고객들 대부분이 백인과 유태인이었는데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 인종차별과 텃새로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기도 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 서러움은 몇 배로 심했지만 그토록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지금은 내 노력에 대해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다. 어느덧 회사에서는 내 전용 업무실이 생겼고 직급이 오르면서 급여도 많이 받고 부하 직원들도 생겼다. 가장 감사한 점은, 내가 이 회사에서 꽤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경력이 밑거름이 돼 매출과 원가 관리 자료를 지원하고 경영 분석 자료를 보스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서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외 취업을 생각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전공이 자신의 진로와 달라서 취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현실이 변화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직접 발로 뛰어서 정보를 수집하고 차근차근 준비하며 자신의 때를 기다리면 분명히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미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고, 그 기회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Profile


윤지은은 학벌보다는 능력과 경험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꿈을 펼치고 싶어 오랜 기간 준비를 거쳐 취업에 성공했다. 영어의 경우 이론 공부보다는 영어 카페나 동호회 등을 잘 활용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외국인 채용 시 토익 등 영어점수는 크게 반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뷰 때는 조금 서투르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목록 목록
이전글
인도양의 흑진주, 탄자니아 잔지바
다음글
준비된 자에게만 해외진출의 꿈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