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필리핀 파견에서 삶의 두 번째 과제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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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해외봉사
필리핀 파견에서 삶의 두 번째 과제를 발견하다
최옥 [필리핀 | 외국인 한국어 교사]
내 삶의 진정한 존재를 찾기 위해 토요일이면 장애인 공동체 시설인 꿈나무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 아이가 내게 했던 말이 내 인생 과제를 바꾸어 놓았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그 이후 ‘진짜 엄마가 되자.’는 것이 나의 삶의 과제가 되었다. 그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2010년 특수교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다양한 곳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범위를 넓히다 보니 해외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활동도 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한국어 해외 강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2013년 유네스코 한국 지부에서 실시하는 <다문화 대상국 교육 글로벌화 지원 사업>에 지원하여 2013년 9월부터 2014년 1월까지 필리핀에서 근무했다. 리존3 산페르난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며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지도하는 일이었다.
코피노 문제로 한국인에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으나 막상 내게 그런 일이 닥치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도 아이들은 나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고, 교무실에서도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 외딴섬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저들의 마음을 녹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이 열광하는 K-Pop CD와 선크림, 팩, 매니큐어, 립스틱 등의 선물을 주는 것과 대장금에 매료된 그들에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겐 김치와 김밥이 너무 비싸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한국 음식들마저 자신들의 것인 양 주장하며 비싸게 팔고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바로잡는 일이 나의 또 다른 임무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중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 가족들이 김치볶음밥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젓갈 중 한국의 새우젓과 비슷한 우공으로 김치를 담가 선물하면서 ‘발효’라는 단어도 알려 주었다. 이 일이 있고부터 나는 주말마다 교육장, 교장, 교사들의 집에 초대되어 요리를 전수하게 되었다.
리존3 교육청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 교사들이 주축이 된 ‘한국인의 날’ 행사가 있었는데, 태권도, 씨름, 젠틀맨, 강남 스타일 등의 공연을 하며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날이었다. 나는 이날도 한국 음식을 만들었다. 한국인의 날 행사가 있고 얼마 뒤엔 학교에서 ‘성탄 다문화 음식 축제’가 있었다. 나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직접 담근 김치와 김밥, 잡채, 떡볶이를 맛보게 해 주었고 호응도 굉장했다.
한국의 수석교사라 할 수 있는 슈퍼바이저의 아들에게 필리핀어를 지도받으며 마셨던 우포 주스는 코코넛의 속을 긁어낸 뒤 설탕을 넣어 만드는 음료로 한국의 식혜와 비슷했다. 이것을 의사소통의 맥으로 잡아 한국의 식혜와 연결해 얘기하면 그들은 특히 즐거워했다.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먹을 때 같이 먹자고 권하는 정 많은 모습도 한국과 닮았다고 얘기해 주었고, 한국 전쟁 때 그들이 군대를 파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며 귀국하기 전까지 끈끈한 정을 나눴다.
열정과 낭만이 있는 한국어 수업 시간
컴퓨터를 수리하지 못하는 불편함, 자주 끊기는 전기, 나오지 않는 물, 바퀴벌레, 개미, 모기. 열악한 환경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 인생 과제와 교사로서의 존재감을 찾기 위한 지원이었기에 이런 건 충분히 인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상황은 나의 막연한 상상을 뛰어넘었다. 습한 날씨에 뭉개지는 분필, 갈라진 칠판, 선풍기로 해결되지 않는 더위, 학교 옆을 지나가는 찌프니의 타는 경유 냄새, 거리에서 날아온 먼지로 찌든 교실. 모두들 마스크나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공부를 해야 했다.
상황이 그렇다고 그들의 마음까지 열악하지는 않았다. 세부의 지진과 잦은 태풍, 폭우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아이들은 한국어 수업을 받으러 내가 사는 월세 집으로 찾아 왔고, 집 전등마저 나가버리자 며칠씩 양초를 켜고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필리핀의 수업 현장에서 한국에 들여오고 싶은 게 있다면, 교사와 제자의 믿음, 열기, 헌신이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상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나는 학생들이 내게 보인 관심이 한국어 원어민과 처음 만나 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제 곧 수업 시간에 잠도 잘 거고 대들기도 할 거라 생각했다. 나의 예측은 예측으로 끝났다. 장애 학생을 대하는 모습이나 학부모, 학생, 교사가 가진 깊은 연대감,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내가 떠나오는 날까지 변함없었다.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마음이다. 시간이 지나도 학생들에게 받은 상처는 잘 치유되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파견 근무를 하며 받은 행복의 에너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그 에너지는 귀국 후에도 이어져 내 삶을 지탱하는 한 부분이 되고 있다. 나에겐 삶의 두 번째 과제가 생겼다. 이주민들의 한국어 교사로서 ‘관계 속 엄마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제를 위해 그들의 모국어를 배우고 있다. 수업 중 그들의 모국어로 의사소통하면서 한국어를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사왓디 캅, 마라밍 살라맛 뽀, 발쇼에 쓰빠씨빠, 쏙써 바이테, 어꾼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