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럽의 홍수를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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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해외취업
유럽의 홍수를 잡아라
차현호 [독일 | Steinbacher Consult 팀장]
가끔 인터넷을 통해 독일 유학을 오려는 학생들을 상담해 주다 보면 거의 대부분이 한국의 입시를 떠나 자유로운 학업을 하고 싶다거나, 이미 대학을 가거나 졸업을 한 경우라면 새로운 학문을 하기 위해 유학을 알아보던 중 학비가 없고 졸업 후 독일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위해 유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런 거창하고 구체적인 목적이 없던 초등학교 때부터 독일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고 유학의 꿈을 키워 왔었다.
나의 미래는 내 꿈에서 시작한다
집안 형편상 조기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 독어 내신은 수를 놓친 적이 없는 것만 봐도 꽤나 집요하게 독일 유학에 매달렸던 것 같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의 괴테 독일 문화원에서 저녁반 독일어를 수강했고 유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매일 3개 이상의 과외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옆에 있던 어머니는 허리에 큰 수술을 받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셨다. 나와 내 동생은 생활비에 대학 등록금까지 벌어야 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학업의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어 기어코 대학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원 과정은 내가 생각하던 학문과 거리가 있었다. 97년 IMF 사태가 터지자 그간 하고 있던 대부분의 과외와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어머니께서 어디서 알아보셨는지 독일 유학원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주시며 이제 독일 문화원이 아니라 진짜 독일에 가 보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와 동생에게 밤새 생각한 유학 계획을 설명하고 유학 상담을 받으러 갔다. 미리 준비해 놓은 유학인 것처럼, 그날로부터 출국까지 겨우 3주가 걸렸다. 유학의 꿈을 접게 될까 두려워 서두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천 공항이 문을 연 다음 날인 4월 1일, 거짓말처럼 나는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주어지는 길이 아닌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라
베를린 공대의 다른 한인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독일에서의 공부는 정말 어렵구나 생각했다. 한국과 달리 독일의 대학은 졸업식이 따로 없다. 공부가 끝나는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 커리큘럼에 맞춰 수업 듣고 과제 하고 시험을 보는 학생은 거의 없다. 독일은 대학 입학이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한국과 같은 입시 학원이나 입시 경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 교육정책은 대학부터라는 말처럼, 그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 내에서 걸러지게 된다. 어느 과목이든 세 번의 낙제는 퇴학을 의미하고 수학, 물리 같은 이공계 기초 과목을 통과하지 못하면 전국 어느 대학이든 이공계입학은 다시 할 수 없다. 모든 시험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 시스템은 물론 학과마다 차이가 있지만, 수업 참여가 필수는 아니다. 출석부도 없고 교수 얼굴 한 번 안 보고 시험에 통과할 수도 있다. 다만 과제를 해야 하고 과목마다 발표도 있고 그런 과정을 이수하면 필기시험을 보게 된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사무처에 구두 시험 신청을 하고 교수와 일대일 구두시험을 본 다음 점수를 받는다.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 과정으로 온 학생들에겐 기초 과목을 비롯한 많은 과목들이 필수 과정이 아니기에 대학원 과목만 듣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 대학의 학부를 듣지 않고 대학원 과정을 바로 하게 되면 생소한 부분이 많아 공부가 쉽지 않다. 나와 같이 입학한 학생 수는 200명이 조금 넘었는데 나중에 졸업장을 받은 사람은 8명뿐이었다. 대부분은 학부과정에서 다른 진로를 택하거나 전문대학으로 옮겨 갔다.
학부 과정을 듣지 않아 생기는 문제라면 학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아침 수업이 끝나면 오후 내내 도서관에 있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구 동독 지역의 삼성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야간에 공장의 벨트컨베이어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불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는데 조금만 긴장이 흐트러지거나 졸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곳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야간 일을 하는 것이 몸이야 무척 힘들긴 했지만, 경제적인 여유는 가져다주었다. 다만 다른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나는 일을 하러 가야 했으니,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간 밤늦은 시간, 못 다한 공부를 하러 아무도 없는 공동 공부방에 들어가 보면 친구들이 내 책상에 저녁거리로 먹을 것을 올려놓고 가기도 했다.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독일, 이집트. 가지각색의 모습들이었지만 가족같이 끈끈하고 돈독했던 친구들이다. 1등으로 학부를 마치고, 독일 사립 재단에서 3년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엔 이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마르기 무섭게 학과장의 연구소 조교로 추천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작은 조교 자리지만 4대보험이 적용되고 향후 취업할 때 경력에 큰 이점이 있는 자리였다. 독일 학생들 앞에서 독일어로 수업을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어느덧 3년을 일했고,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하는 졸업 시기가 찾아왔다.
독일 엔지니어로서의 첫 발걸음
독일은 졸업논문을 내고 점수 받으면 졸업장이 바로 나오는 시스템이라 졸업식이 없다. 학과마다 자율적으로 졸업자들의 가족들을 초대해서 졸업식을 하긴 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우리 과의 경우에는 졸업자들에게 성적에 따라 장학금과 상장을 수여하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큰 행사가 있다. 나는 졸업생 중 2등으로 졸업하여 DAAD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취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집스럽게 독일 공공 기관에만 지원을 해서 그런지 면접에서 항상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독일 국방부 국방대학의 연구소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고, 하천 바닥의 퇴적화를 개선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약된 2년을 채우고 나는 다시 새 직장을 구해야 했다. 공무원은 연차에 따라 연봉이 오르기 때문에 희망 연봉을 적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일반 기업에 지원할 때는 내가 판단해서 적정한 연봉을 써내야 했다. 연봉을 높게 쓰자니 서류 심사에서 떨어질 것 같고 너무 낮게 쓰면 내가 너무 가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주변에 자문을 구했으나 사람마다 액수의 차이가 컸다. 결국 내가 생각한 최고액의 절반 정도를 적어서 지원했더니 몇몇 회사가 관심을 보여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봉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터뷰에 들어가면 다시 희망 연봉을 물으니 그때 가서 인터뷰 분위기에 맞춰서 조정하면 된다. 물론 처음 연봉이 맘에 안 들더라도 매년 연봉 협상할 때 자신의 업무량과 실적을 제시하고 올려 가면 된다.
그러다 헤드헌터를 통해 아우크스부르크의 Steinbacher Consult에서 연락이 왔다. 하천 개발과 홍수에 대한 기술 자문직에 뽑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창립된지 50년이 넘었고 독일에 7개의 지사, 외국에 5개의 지사를 둔 건설 기술 컨설팅 회사였다. 나는 현재 이 회사의 홍수에 대한 전문 기술 자문팀 팀장이 되어 각 도시 시의회에 예상 홍수 면적을 브리핑하고 방지를 위한 연구와 자문을 하고 있다. 내가 맡은 지역이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이다 보니 아시아인인 내가 앞에서 그 지역에 대한 브리핑 및 발표를 하면 신기하게 보는 사람이 많다. 남부에는 아시아 사람이 거의 없고 한국 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회사들은 고급 인력에 항상 배고프다
독일은 2006년 외국인 취업 및 이주법을 대폭 개선했다. 독일이 점차 고령화로 접어들면서 연금 수령자가 연금을 내는 사람보다 많아질 전망이라는 보고에 따라 이민법과 취업 비자를 개선한 것이다. 이민자의 경우 투자 이민은 이전 100만 유로에서 50만 유로로 대폭 절감됐다. 또한 입학생에 비해 졸업생 비율이 턱없이 부족한 대학 구조가 독일 산업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에 따라 교육 시스템까지 변혁되었다.
그렇다고 독일에서의 취업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회사에 따라서 굳이 독일어를 요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어 회화 능력이 있으면 업무 가능 여부를 지켜본 뒤 정식으로 채용한다. 하지만 현지어를 하지 못하는 책임자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현지어로 보고서도 쓰고 회의도 주도해야 한다.
취업을 하게 되면 6개월 혹은 1년의 견습 기간을 거친다. 이 기간에 직장 동료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는지 또 업무에 얼마나 적응하는지 심사를 받는다. 그러고 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이 된다. 일반적인 독일 계약은 1년의 견습 기간과 2년씩 두 번의 계약연장으로 이루어지고, 5년 차에는 정년을 보장받는 종신 계약을 맺는다. 5년 차 연장을 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고 8년 차가 되면 시민권 자격도 주어진다.
독일은 현재 유로 가입국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 이태리, 스페인 등이 경제 위기를 겪을 때 가장 많은 경제 지원을 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만큼 경제, 산업이 안정되어 있고 전체 실업률 7퍼센트로 고용까지 안정되어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독일에서의 생활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사실 독일 세법을 묘사한 말이다. 그만큼 세금법이 상세하고 완벽해서 전 세계 세법이 모두 독일 세법을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외국에 취업해서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세무서 가는 일이다. 그렇다고 비싼 세무사에게 매번 상담료를 낼 수도 없으니 독일에서 일한다면 Lohnsteuer Verein을 이용하는 게 좋다. 연봉에 따라 다르지만, 일 년에 정해진 회비만 내면 언제든지 찾아가서 문의할 수 있고 복잡한 세무서 양식도 알아서 작성해 준다. 필요한 서류만 가져다 주면 세무서에 갈 일이 없어 독일인들도 이 연합을 많이 이용한다.
독일에는 전세라는 개념이 없어 본인의 집이 아니면 모두 월세로 살아야 한다. 독일의 월세는 지역마다 차이가 큰데, 뮌헨은 전국에서 월세가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다. 시내의 경우 50제곱미터의 아파트 월세가 한화로 150만 원 정도 하니 각종 세금, 관리비, 전기세, 생활비까지 하면 라면만 먹어야 될 수도 있다. 물론 더 저렴한 아파트도 많지만 월세 구하는 것은 늘 큰 문제이고 독일 정착의 첫 걸림돌이기도 할 것이다.
내 소중한 경험들이 조국을 위한 도구가 되기를 바라며
독일 시민들을 위해 수해와 하천의 친환경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점점 내 조국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고민하게 된다. 그간 대학과 정부 기관을 거쳐 기술 컨설팅을 하다 보니 독일의 체계적인 기술 노하우를 한국의 국토에 적용하고 싶어졌다. 우리 회사는 독일과 유럽에서 쌓은 기술이 상당하기에 나는 얼마 전 임원 회의에서 한국과의 기술 교류를 제안해서 승인을 받아 놓은 상태이다. 한국 수자원 공사와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향후 기술을 교류하는 파트너십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냈는데, 어떤 대답이올지 기대되고 설렌다. 여태껏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재방과 하천의 친환경 개발에 기여하는 것이 내 다음 도전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