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외취업을 통해 이어가는 나의 인생
- 작성자
- 서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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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해외취업
해외취업을 통해 이어가는 나의 인생
이민선 [미국|리소스 매니저]
나이 때문에 환경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할 때가 분명 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해외취업을 준비하면서, 두렵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취업을 한 지금도 두려움은 있다. 하지만 진심을 다 하고 최선을 다 하면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알아주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해외 인턴이라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지금 현재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이고 다가올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서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혹은 다른 어떤 곳이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아갈 생각이다. 쉬어가는 삶보다 이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새로운 다짐을 한다.
새로운 탈출구를 갈구하다
2011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2호선에 몸을 싣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직장으로 향했다. 직장 생활을 한지도 5년 남짓 직장인 사춘기라고 하는 것이 내게도 찾아와 무기력함과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으로 하루하루 일개미처럼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한 자리를 잡고 초점 잃은 눈으로 지하철 광고를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내가 뭘 위해서 이러고 있지?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취업을 해서 고향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발목에 족쇄처럼 따라 다녔다. 20대에 열정도 사그라들고 그렇다고 30대에 집중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했던 나는 새로운 탈출구를 갈구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그 의문의 해답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당시 직장에는 글로벌 인력이 많았다. 미국, 그리스,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인재들이 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그리스 출신 동료에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리스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영국, 두바이 등등 세계 각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도 그 중 한 곳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한국에 서울, 강남에 한 회사만이 내 인생에 전부인 것이 못내 속상하고 나도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서른이 넘은 나이, 미국 번역회사 인턴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 때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한국을 벗어나 좀 더 큰 무대로 발돋움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외에 나가서 대학공부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제도가 있긴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찾은 답이 해외 인턴 제도였다. 기왕 해외에 나가는 거면 경험도 쌓고 돈도 벌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1년 후 미국으로 날아가 인턴부터 시작하자라는 목표가 생겼다. 항상 울면서 겨우겨우 일어나 출근을 하던 내가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퇴근 후에도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무기력하기만 하던 나의 생활은 해외 인턴이라는 목표를 통해 조금씩 활력을 되찾아 갔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미국 인턴을 가기 위해 필요한 문화교류 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인터뷰에 대비해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나의 전공과 경력에 맞는 회사를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곳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시아 언어 전문 번역회사였다. 나의 전공은 일본어다. 미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나라 언어를 가지고 갈 곳이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 번역회사 인턴 자리가 난 것이다.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일본어 통역, 번역 일을 계속해온 터라 나에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 담당자와 전화 면접을 보았고 다행히 실수 없이 영어 면접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날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드디어
미국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사관 인터뷰도 무리 없이 통과하고 비행기 티켓도 준비하고 짐도 싸고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사실 미국에 인턴으로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다. 적은 나이가 아니고 시집도 가야 할 텐데 잘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에, 그것도 인턴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 만류가 만만치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라면 경험 삼아 좋겠지만 서른이 넘은 여자가 왜 굳이 미국을 가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 자신도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패하고 돌아오면 어떡하지? 다시 돌아와서 직장을 못 구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하루에도 열두 번 씩 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적응하고 좀 더 발전된 나를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런 모든 걱정도 싹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2012년 여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여유가 넘치고 모르는 사람들도 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미국을 상상하던 나의 꿈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고 산산이 깨졌다. 로스앤젤레스는 그야말로 다인종 집합소와 같았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 베트남, 멕시코, 인도 등등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점령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배웠던 영어 발음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나처럼 제2언어로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발음을 알아듣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만만치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턴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인턴에서 정직원이 되기까지
내가 해외 인턴을 경험하게 된 번역회사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미국인은 물론 필리핀, 남아공, 베트남, 인도네시아, 멕시코, 일본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는 곳이었다. 내 소개를 하고 앞으로 필리핀 출신 매니저에게 일을 배우면서 지내게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잔뜩 긴장도 했고 미국 회사 경험이 없는지라 이 매니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고 헤매는 내가 영 탐탁지 않은지 이것저것 시켜 보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사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 매니저가 나는 의사소통도 안 되고 일도 못 해서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고 보고를 했고 회사 대표와 상의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려주겠단다.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국에 온지 딱 3일 되는 날이었는데 그 길로 나는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여태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 없는데 억울하고 비참한 기분에 눈물이 났다. 복잡한 심정을 추스르고 다음날 출근을 하니 인사 담당자가 포지션을 바꿔서 일을 하도록 최종 결정이 났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날부터 일본어팀 소속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당장 한국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보다 일 못한다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열심히 해서 필리핀 매니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업무는 번역에 필요한 리소스를 찾는 일이었다. 세계 각국에 있는 일본어 번역자를 찾아 번역 일을 의뢰하기도 하고 번역에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는 등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의사소통은 영어와 일본어로 해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내게 좀 더 유리했다. 일본어 번역은 고객이나 번역자 모두가 까다롭기 때문에 회사가 오래 전부터 다루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번역자가 최대한 우리 회사와 일하기 편하게 도와주고 고객에게 번역을 이해시키는 등 중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불안했던 번역자 품질 문제, 충분한 번역자 확보 등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회사에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동료들과도 허물없이 지나며 주말에 함께 LA맛집을 찾아 가기도 하고 생일에 초대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굴욕을 주었던 필리핀 매니저와도 가장 친해져 결국은 나를 이것저것 챙겨 주면서 가끔은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나의 보호자 같은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인턴을 시작한지 4개월쯤 되었을 때는 미국 번역가 협회(ATA)에서 주최하는 콘퍼런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리소스를 찾는 업무를 하니 콘퍼런스에 가서 번역가들을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로스앤젤레스를 벗어나 가본 적 없는 샌디에고라는 도시에서 전 세계 언어의 번역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회사 대표로 참가 하는 것이기도 하고 부스에 번역자들이 오면 질문에 대답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엄청나게 긴장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3박 4일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누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인턴 생활을 하던 막바지쯤 회사에서 좀 더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인턴 기간 동안 열심히 일했고 잘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일하자는 내용이었다. 1년 반이라는 인턴 기간 동안 사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억울한 일도 많았다. 가족을 떠나 밥도 잘 못 챙겨 먹고, 영어 못 한다고 무시당하기도 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인정받는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었다. 나는 회사에 제안을 감사히 받아 들였고 회사가 나의 취업비자를 스폰서 해주었다. 나는 더이상 인턴이 아닌 정식 직원으로 미국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쉬어가는 삶보다 이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
현재 나는 인턴으로 시작한 번역회사에서 3년째 리소스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일본어 뿐만 아니라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언어에 대한 리소스 관련 총괄업무를 맡고 있다. 책임이 커진 만큼 부담도 크지만 3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에 비해 많이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영어 의사소통도 편해졌고 고객과의 미팅에도 참가하고 있다. 매년 미국 번역가 협회 콘퍼런스에 올해로 총 4번째 참가를 하게 되었다. 샌디에고, 샌안토니오, 시카고, 마이애미 등 미국 내에 다른 도시에서 많은 번역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와서 회사에 대해 묻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농담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매년 참가 하다 보니 그 곳에서 친구도 생기게 되고 항상 내년에 또 보자는 인사로 헤어지곤 한다.
4년 전 2호선 열차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한숨만 쉬던 나는 이제 여기 없다. 위기도 있고 두려움도 있지만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조금씩 성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전해 나아가고 있다. 나이 때문에 환경 때문에 포기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때도 있다. 두렵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두려움은 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알아주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해외 인턴이라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지금 현재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다가올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서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혹은 다른 어떤 곳이든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아갈 생각이다. 쉬어가는 삶보다 이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새로운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