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넘치게, 채워줘

작성자
서재민
조회수
5,073

장려상 / 해외인턴

넘치게, 채워줘

 

김가영 [카자흐스탄 | 고려일보 인턴]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들이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고통과 시련, 도전을 채울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그 모든 것들이 내 꿈으로 변해서 넘치도록 흐르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

 


모두에게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한 순간을 기점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그런 경험.
K-Move 멘토링 시스템을 알게 된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교환학생시절 만났던 그 곳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따라 카자흐스탄에 또 가고 싶었다. 그 때 월드잡플러스 홈페이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멘토링에 관해 관심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성공한 ‘멘토’의 멘티가 되고 싶다고 신청했고 그는 나를 받아주며 꿈이 실현되었다. 멘토님은 맨 몸으로 카자흐스탄에 와서 성공을 일군 1호 한인으로 꼽히는 분이셨다. 맨몸으로 중앙아시아에 온 20대를 거쳐 러시아어를 독학한 후, 이벤트 및 마케팅 사업과 한인일보라는 신문사까지 운영하는 입지전적인 비즈니스맨으로 거듭난 인물. 그분은 언론사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내 적성을 고려하신 후, 고려일보라는 신문사에 다리를 놓아주
시며 지속적으로 도와주셨다. 적은 보수를 받더라도 의미 있는 곳에서 해외 인턴쉽을 진행하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진 날. 감격과 설렘 속에 낯익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반년 만에 돌아온 카자흐스탄은 변한 게 없었지만 학생 신분이 아닌 채 새롭게 돌아온 내 속의 열정은 새벽 별처럼 반짝였다. 

 

 

설레던 첫 출근, 기분 좋은 떨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까레이스끼 돔이라는 큰 빌딩에 들어가자 남경자(러시아 이름 : 알렉산드라 남) 선생님이 맞아주셨다. 러시아어도 잘 못하는 낯선 한국 여자애를 딸처럼 아껴주신 그 분이 어찌나 그리운지.

 

한국과 카자흐스탄과의 협력 사업을 지원하는 총괄 부서가 위치해있기에 이름도 ‘까레이스끼 돔’, 한국인들의 집이었다. 문화 예술 교류 및 대학 협력과 장학 사업 등 한국의 소프트파워 위력을 뽐내는 사업들이 진행 중이었다. 개중에서도 내가 인턴으로 일한 곳은 고려일보였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을 위한 신문사로, 신문 페이지 절반은 러시아어와 한국어로 쓰여 발행되는 곳이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등에 정착한 교포를 말한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극동 러시아에 살던 17만 명의 한국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명목 하에 시민들을 황무지로 보냈다. 그들이 일궈놓은 토지와 재산들은 대부분 주인을 잃은 채 남게 되었고, 그들은 빈손으로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주 도중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들거나 지쳐서 죽었고 약한 사람들은 버려졌다.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이들도 추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주민들은 척박한 땅에 벼농사를 시작했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삶의 방식을 회복했으나 수십 년간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에서부터는 한국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젊은 고려인들은 자신의 뿌리와 한국에 대해 호기심과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어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많은 이들이 죽고, 병들고, 버려졌던, 모든 걸 잃어야 했던 역사를 온 몸으로 견뎌내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재러 교포들이 발간했던 신문. 100년 가까운, 켜켜이 쌓인 시간만큼 고려인들의 수난과 고통, 해바라기처럼 고향을 바랐던 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았던 산 증인. 몇 십 년 전 영광의 순간에 많은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교포들이 발간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 그러나 현재는 극심한 자금난과 한국인들의 무관심 등으로 인해 폐간 위기에 처해 서서히 죽어가는 상황이다. 역사시간에 몇 줄 배우고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눈앞에서 숨 쉬는 현재라는 사실 앞에서 해외인턴 이상의 무거운 가치와 책임감을 갖게 했다. 

 

 

“네가 김 사장님이 말했던 한국에서 온 애구나? 한국 이름은 카자흐스탄 기자들이 발음하기 어려우니 이 곳의 이름을 짓자. Галия, 갈리야. 어떠니? 그래, 이제부터 우리 일원인 갈리야다.” 누군가 말했다. 이름 짓는 것은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일찍이 한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꽃으로 다가왔다고도 했다. 갈리야는 김가영 인생의 한 페이지에 꽃갈피를 끼웠다.

 

 

운명 같은 ‘소련 여행기’

 


고려일보의 기간제 기자로 채용이 되자 바로 알렉산드라 선생님을 도와 기사로 쓸 재료들을 찾는 일에 투입되었다. 좀 더 심도 있고 깊이 파야 하는 기사들은 러시아어로 쓰여서 내가 도울 일이 많지 않았다. 주로 기사감이 될 시사 상식이나 한국 및 카자흐스탄의 동향, 경제 상황 및 문화, 한국에서 화제가 된 일을 찾아 기사를 썼다. 그 후 편집부의 검토를 거쳐 게재되었고 한국의 대학교류팀이나 협력 단체 등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때
필요한 공공 문서들을 번역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점차 일을 잘 해낸다는 평을 받으며 특집 기사들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연령대가 꽤 높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 아이템을 발굴하고 기사로 완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어 지면에 실릴 기사이지만 주 독자들이 현대 한국어를 이질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더 신경 써야 했다. 모국과 떨어진 채 몇 십 년을 산 독자들이니 어린 내가 쓰는 현대 한국어와 문법을 쓰면 어려워했다. 또한 기사의 길이도 정해져 있어서 이야기를 축약하느라 진땀을 뺐다. 내가 냈던 아이디어들로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숨은 명소 여행기’, ‘시선집중, 카자흐스탄에 사는 외국인들의 인터뷰’, ‘한국인이 보는 카자흐스탄’ 등이 있다. 일반 기사뿐만 아니라 호흡이 긴 특집 기사를 연재하는 것은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 펜이 가는 길을 응원하는 다른 기자들과 알렉산드라 선생님을 뒤에 업고 지내던 어느 날,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내가 쓴 여러 특집 기사들 중 ‘소련 여행기’는 카자흐스탄이 30년 전까지 소비에트 연합에 속했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 인턴 시작 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던 경험담과 카자흐스탄의 도시들을 방문했던 후일담과 엮으면 통일성을 가져 더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다.

 

“비자를 갱신할 겸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가겠습니다. 일주일가량 체류하며 그 곳의 사람들과 정세, 치안 등 전반적인 것을 기사화할 예정입니다.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허락해주세요.”
물론 나 때문에 신문사는 발칵 뒤집혔다.
“갈리야, 우크라이나는 슬라브 문명과 러시아 정교회의 성지 등 아름답고 신비로운 문화가 많은 곳이지만 다들 걱정해. 수많은 구소련 나라 중에 굳이 크림반도 때문에 러시아와 분쟁 중이고 예전에는 말레이시아 비행기가 격추당했던 곳으로 가야 해? 안 갔으면 좋겠다……. 그냥 하루만 다른 데서 쉬다 오는 건 어때?”
 

여행 작가가 꿈인데 그 정도는 극복해야 한다며 큰 소리 치고 짐을 쌌지만 솔직히 걱정됐다. 연고도 없는 곳이고 심지어 외교부가 지정한 ‘황색 경보 지정 국가’였다. 설상가상, 우크라이나 동부는 ‘적색 경보’까지 발령받은 상황이었다. 알아볼수록 무서웠다. 그래도 고려일보 사상 처음으로 임시 특파원 신분으로 여행기를 연재할 수 있다는 기회와 한국인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처녀지 같은 곳에 카메라와 펜만 갖고 떠날 수 있다는 데 집중했다.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갖고 오겠다며 강한 척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제야 고려일보도 종군 기자마냥 떠나는 나를 위해 휴가를 비롯한 작은 지원을 해주며 최종 허가를 했다.

 

잔뜩 긴장한 채, ‘소련 여행기’를 완성하겠다는 독기만 품고 도착한 우크라이나. 놀랍게도 그곳은 안전했으며 인종차별이나 폭력 시위, 비상사태 등 상상했던 불안요소는 전혀 없었다. 현지인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며 그녀가 일러주는 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통째로 등재된 암벽 수도원과 실제로 죽은 수도사들이 미라가 되어 영면하고 있는 지하 묘지, 세계대전 참전을 권유하는 거대한 크기의 ‘조국의 어머니 상’,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던 ‘마이단 광장’.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박물관 등 경이로운 슬라브 문화를 헤집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도와줬고 괜히 영어로

말을 걸면서 미소 짓거나 사진을 찍어줬다.

 

어떤 할머니는 수도원에서 미사포를 쓰지 못하고 낑낑대는 내게 다가왔다. 러시아 정교도도 아니면서 이런 성스러운 곳에 왔냐며 일갈하려는 것일까? 난 움츠러들었다. 내 앞에 선 그녀는 웃으며 러시아 정교 방식으로 성호 긋는 법을 알려줬다. 미사포를 내 머리에 씌우고 알 수 없는 우크라이나어로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어느 날, 혼자 사진을 찍느라 고군분투하는 내가 안타까웠던지 어떤 노신사는 내 손을 잡고 사진이 잘 나오는 곳으로 인도했다. 그 후 뭐라고 웅얼대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한 아이는 쥐고 있던 작은 꽃들 중 하나를 뽑아 건네며 “하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과 눈빛과 말을 섞는 날이면 으레 나는 약해졌다. 인간에 대해 가졌던 염세적인 회의감을 씻고 괜히 눈물이 났다. 작은 곳에서부터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서 곧바로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다정한 사람들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갑고 무뚝뚝하고 웅장했던 러시아의 유럽,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소박하고 기이한, 따뜻한 잿빛 투성이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황금처럼 빛나는 수도원과 미라가 된 수도사들이 던지는 죽음에 대한 의미와 폭력에 짓밟혔을지언정 부서지지는 않았던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한 나라였던 국가들이 각각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씁쓸하면서도 운명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추억을 갈무리했다. 

 

 

소련 여행기’ 그 후

 

 

우크라이나 여행기를 완성하자 기자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과 칭찬이 쏟아졌다. 그 후로도 외국인들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연재했다. 교환학생 시절 알고 있던 한국인, 중국인, 우즈베키스탄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은 수월했다. 그러나 명색이 “시선집중, 카자흐스탄에 사는 외국인들의 인터뷰”였기 때문에 내 인맥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외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펍이나 클럽 등에 갔다. 외국인인 내 신분을 이용해서 갖은 애를 쓰자 겨우 친해질 수 있었다. 결국 독특한 사연들 때문에 카자흐스탄까지 온 이들과의 인터뷰를 따낼 수 있었다. 미국, 스페인, 한국,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세계화되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세상에 내보낸 기사들은 대부분 참신하고 재밌다는 평을 받았다. 감사한 일이다. 마법의 여름이 끝나고 비자, 복학 문제로 인해 고려일보의 좋은 사람들과 작별할 시간이 왔다. 우리의 마지막 점심은 치킨이었다.

“너무 맛있네요! 한국에서 먹던 맛이랑 정말 똑같아요. 신기하다.”
그들은 눈을 마주치며 비밀 모의라도 했던 듯이 순박하게 웃었다.
“이제 갈리야가 집에 가니까. 우리끼리 돈을 좀 모아서 한국이랑 제일 비슷한 맛을 낸다는 치킨 집을 겨우 찾았어. 마지막으로라도 맛있는 걸 해주고 싶어서. 그간 고생했으니.”
그 말에 아연해진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다 먹었다며 작별을 고했다. 한 명 한 명에게 건강히 잘 있으라고, 고려일보를 부탁한다고. 그 때 알렉산드라 선생님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우리 신문사가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간 고생했던 것 안다.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려고 그간 조금씩 모은 돈이야. 맛있는 것 사 먹고. 부디 건강해라. 갈리야. 또 보자.”
여든이 다 된 그녀의 부스러질 듯한 몸을 꼭 안았다. 울음을 삼키고 봉투를 손에 쥐고 씩씩한 척 밖으로 나섰다. 카자흐스탄에서 얻은 것은 비단 인턴쉽 이력뿐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다란 무엇이었다. 나는 손 흔드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외치며 문을 나섰다. 모두들, 안녕히 계시라고- 그간 감사했다고- 부디,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시라고. 꼭.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들이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돌아온 후의 내 인생은 2막을 열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인턴쉽 이후와 이전으로 갈릴 정도로. 우선 소규모 출판사 몇 군데와 구소련 여행에 관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두고 의견 교환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여행 사진과 짤막한 글을 올린 것이 호평 받았기 때문이리라.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내가 어느덧 이러한 제안을 받은 것 만해도 영광이다. 버킷 리스트였던 여행 작가라는 타이틀이 드디어 실현되는 셈이다. 고려인 및 역사에도 관심이 생겨서 틈나는 대로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있고 마음에 빚을 진 고려일보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단 몇 달간이었지만
남들보다 더한 운을 거머쥐고 해외인턴을 진행했던 것이 꿈결 같다. 이제는 한국에서 큰 도약을 위해 영어공부와 다른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며 정식으로 해외취업을 준비한다. 카자흐스탄에서의 꿈을 딛고 현실로! 나처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택하면 어려움과 좌절감, 밀도 높은 공포가 닥치기 일쑤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으며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고 주기적으로 자금난에 시달리고. 하지만,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들이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고통과 시련, 도전을 채울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그 모든 것들이 내 꿈으로 변해서 넘치도록 흐르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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