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절망을 느끼는 그때가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다
- 작성자
- 서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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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해외취업
절망을 느끼는 그때가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다
손형국 [캐나다 | Horton CB&I]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처럼 시냇가를 가로질러 강과 바다로 흘러가는 저 물처럼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넓고 광활한 땅 캐나다로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길 바랍니다.
절망을 느끼는 그때가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다
올 가을은 어느 해보다 유난히 길다. 아침저녁으로 다소 쌀쌀하지만 낮의 햇볕은 따갑고, 높고 푸른 하늘은 머나먼 타국 캐나다로 떠나 올 때까지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하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낙동강 변에 높게 뻗은 그 나무가 자꾸만 그리워 작년 뒷마당에 미루나무 9그루(Swedish Aspen)를 심고 메이플 단풍나무 2그루를 심었다. 가지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을 보고 있자니 햇수로 9년 전 이맘때 기대보다 불안한 마음만 가득안고 캐나다에 도착한 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동토의 땅 캐나다 앨버타. 2006년 10월 14일 공항 문을 나서니 황량한 벌판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나를 주눅 들게 하였고 이틀 후부터는 함박눈이 끊임없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해를 넘겨 5월 초순까지 온 사방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1년에 6개월 정도 기나긴 겨울이다. 폭설과 함께 영하 40~5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혹한의 기온에 오롯이 내 몸 하나로 버티면서 시베리아 벌판 같은 곳에서 일해야 한다는 게 처음엔 그리도 두려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희망이 보이고 세월이 흘러 희망을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떠한 추위와 혹한도 이젠 두렵지 않다.
나는 대한민국 용접사이다. 1988년 2월 울산직업훈련원 일반과정 용접과를 수료하고 울산의 한 조선소를 시작으로 30대 중반까지 수많은 현장을 누비며 휴가나 여행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가정을 이루면서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쪼들리는 생활에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돈을 버느라 얼굴도 보지 못한 능력 없는 가장이었다. 뭔가 지금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 아이들에게 다시 이런 환경을 물려줘야만 한다는 절망과 상실감이 나를 해외취업으로 눈을 돌리게 했던 첫 번째 이유다.
2004년부터 준비하던 호주취업이 2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하면서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을 때 캐나다 서부 쪽으로 오일산업이 호황을 누린다는 신문보도를 읽고서 호주 쪽은 과감히 단념을 하고 캐나다 행으로 마음을 굳힌 지 5개월 만에 기적처럼 캐나다 노동청으로부터 취업허가증을 받아 캐나다에 올 수 있었다.
인터넷을 뒤져 캐나다에 살고 있던 교민과 연락이 닿았고 그분의 도움으로 나의 이력서를 현지 회사에 제출하여 6개월 취업허가증을 받았는데 6개월 비자 기간에 캐나다 용접 시험(이론과 실기)을 통과해야만 비자 연장이 가능한 살얼음 같은 조건부 비자였다. 다행히 나는 6개월 기간 안에 시험을 통과하였고 그 후로도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살아남아 현재는 캐나다 유니언 소속으로 북극으로 가는 초입 Fort Hills의 오일샌드 현장에서 Welding Supervisor와 QC로 일을 하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영어는 실력 다음
캐나다로 올 때만 해도 내 나이 서른 후반이 되었을 때다. 어렵사리 취업허가증을 받아놓고 “영어도 되지 않는데 과연 이 나이에 캐나다로 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캐나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런 걱정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하루하루 살아 남기위해 발버둥치는 데 다른 생각이 들어올 자리도 없었다.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생소한 현장 용어도 빨리 익혀서 실수 없이 일해야 회사에서 Lay Off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수많은 현장을 다니며 잔뼈가 굵은 나의 일머리가 가끔은 나도 모르게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주는 일이 생기면서 회사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제대로 된 영어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나의 영어 실력을 알면서도 나의 아이디어나 생각을 듣기위해 공정에 관한 업무 회의에 참석을 허락했다
공정회의에 참석을 해도 사실 겨우 4~50% 알아들을까말까 했지만 도면으로 나에게 따로 설명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짧은 영어지만 최선을 다해 나의 의견을 말하면 그들은 또 최대한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다. 현장에 가서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그들이 눈으로 확인하고 바로 현장업무에 적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아, 제대로 말이라도 시원하게 해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체계적인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과 함께 일에 대한 흥미가 점점 달아올랐다.
사실 용접이란 직업은 다른 직종과는 달리 한국에서 제대로 기본을 배우고 현장에서 최소 5년 이상 실무를 경험했다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캐나다 회사에서 얼마든지 인정받고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도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캐나다인과 비교해서 빠지지 않는 실력덕분에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지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 없어 그즈음엔 아예 영어와는 담을 쌓고 있었는데 이일을 계기로 다시금 영어공부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산하 울산직업훈련원(현 울산 폴리텍대학 구 울산기능대학) 용접과를 수료했다. 2011년 어느 날, 회사에서 내게 진급이 곧 될 거라며 서류를 요구하기 전엔 적어도 살아오면서 스스로 직업훈련원 수료가 자랑스럽다거나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더더욱 직업훈련원 수료증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거라고는 꿈에라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캐나다 Apprenticeship 3년 과정 수료증이나 그에 상응한 과정을 마친 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나는 캐나다 Apprentice 과정은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기에 이미 서류면접에서 탈락할거라 생각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국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하니 일단 그거라도 제출하라고 해서 휴가를 내고 한국을 방문해서 (당시 울산기능대학)영문 수료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발급받고 공증을 받아서 회사에 제출했다. 회사에서는 캐나다 3년 과정보다 월등히 많은 교육시간(이론과 실기)과 한국에도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으며 덕분에 추가 서류도 없이 본사에서 단번에 서류합격 통보를 받고 슈퍼바이저 교육과 Level 1. Quality Control 교육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주일 호텔에서 합숙하며 8시간 이론교육과 팀원 간의 토의와 질의 그리고 그날 공부한 내용에 대한 시험을 쳐서 80%이상 마크를 받아야만 탈락하지 않는 교육과정이 영어가 짧은 나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주기적으로 회사에서 교육받던 내용들이 중복해서 많이 나와 다행히도 시험에서 탈락하지 않고 턱걸이로 통과했다. 토의 준비는 밤마다 내일 일정표에 맞추어 발표할 것과 질문할 것을 쓰고 달달 외워 겨우겨우 탈락의 위기를 넘기면서 마지막 날 슈퍼바이저 임명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 후 3일 동안 영어에 대한 울렁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으며 드러누워야 했지만 회사에서 받는 교육마다 내 영어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조금씩 그들만의 문화와 생각 그리고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기본지식과 현장경험이 여기서는 최고의 재산이다
캐나다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를 대부분 결정짓는다. 한국처럼 모든 학생이 4년제 대학을 졸업을 해야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은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만난 캐나다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아니다. 사람마다 가진 재주가 가지각색인데 모두가 의사가 되고 판사 변호사 기술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절대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등학교에서 이미 진로를 결정짓고 도제과정(한국의 폴리텍대학과 비슷 또는 산학협동과정) Apprenticeship 3년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포맨(Foreman)이 되고 슈퍼바이저(Supervisor)와 Q C (Quality Control)로 진급하고 Welding Inspector와 Welding Instructor 그리고 General Foreman을 거쳐 Superintendent C S (Construction Supervisor), 즉 엔지니어까지 진급을 한다.
물론 임원까지도 진급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곳이 캐나다이며 실제로 나의 보스들 모두가 캐나다 도제과정 3년을 마친 사람들이며 그들의 대한 대우나 보수는 한국에 살고 있는 기능인들은 상상을 못 할 정도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보수 그리고 사회적 대우나 시선 또한 절대 뒤처지지 않으며 오히려 기능인들이 더 많은 보수와 대우를 받는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곳이 캐나다다.
어느 직종을 불문하고 이론과 기능을 항상 함께 공부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용접으로 해외취업을 원한다면 용접 이론 책에 나온 영어로 된 용어만 전부 익혀도 이미 반은 영어를 정복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마흔이 되어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혀가 굳어 잘 굴러가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변명이지 젊은 사람은 제외) 내가 만약 용접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공부를 체계적으로 직업훈련원에서 배우지 않고 우수한 기능만 한국에서 배우고 캐나다에 왔다면 용접 잘한다는 소리만 몇 번 듣고 끝났겠지만 업무에 대한 이해와 공정을 효과적으로 앞당기는 아이디어를 내고 모든 용접사가 불량률이 낮아지는 결과를 얻게된 회사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내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사람 대한민국 용접사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과 실력을 단연 세계에서 으뜸인 한국에서 배우고 익혀서 해외취업에
도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취업 성공이란 과연 무엇일까?
물설고 낯선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취업하고 살아남는 건 내가 살던 곳에서 업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견디고 이겨내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적까지 많은 고민을 했던 건 ‘취업성공’이라는 단어와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을 조금만 나누어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은이가 이 넓은 땅으로 와서 나보다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후배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9년이란 세월 동안 직접 보고 느끼고 온몸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망설임 끝에 나의 작은 소견을 글로써 표현하는 용기를 내어본다.
대한민국 땅덩어리의 100배가 넘는 캐나다의 인구는 이제 겨우 3천 5백만 명을 넘겼고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20~30만 명이 취업과 이민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한국 사람은 그중 극히 소수를 차지하니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늘도 취업에 목을 매는 젊은이들이 스펙 쌓느라 지쳐가고 목표를 잃어버린 청춘들이 방황하는 대한민국. 이젠 그곳을 넘어 세계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캐나다 서쪽 끝 밴쿠버에서 동쪽 끝 노바스코시아의 핼리팩스까지 차를 타고서 밤낮으로 6천Km 이상을 달려야만 동서 횡단을 할 수 있는 광활한 대지 위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들어와 새로운 또 하나의 대한민국 건설을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어야 할 것이 너무너무 많지만 한정된 지면관계로 여기서 끝맺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앞으로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면 캐나다에서 한국 사람들의 취업에 대한 정보 그리고 도전과 실패의 삶에 대한 생생한 소식을 한국에서 해외취업의 꿈을 키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다.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처럼
시냇가를 가로질러 강과 바다로 흘러가는 저 물처럼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넓고 광활한 땅 캐나다로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