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국경 없는 요리사, 김다희
- 작성자
- 서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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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15
우수상 / 해외취업
국경 없는 요리사, 김다희
김다희 [싱가포르 | 한식조리사]
꿈꿔왔던 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늘 습관처럼 그래왔듯 나 자신에게 행복한 최면을 걸기 위해 오늘도 일기장에 적어본다. ‘나의 꿈은 요리로 봉사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배고픈 전 세계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이 한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달려 나갈 것이다. 국경 없는 요리사, 김다희가 되기 위해서.’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님, 저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겠습니다. 요리사가 되고 싶어서요. 요리학원 다닐 수 있게 야간자율학습 좀 빼주세요.”
고등학교 3학년, 다들 한창 수능준비에 분주할 때 나는 요리사가 되어야겠다는 의사를 선생님께 전달했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외국어를 쓸 수 있는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조금은 막연한 생각을 했던 나. 집과 학교에서는 내가 좋은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해서 대부분의 한국 가정이 그렇듯 안정적이고 남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갖길 원했다. 그들의 기대에 맞추어야 된다는 생각에 정했던 나의 진로는 무역관련 과에 진학하여 유독 관심이 많았던 식품관련 무역 일을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하루빨리 세상을 보고 싶었다. 틀에 박힌 교육제도가 싫어 교외활동을 통해서 쌓는 경험을 소중히 했다. 학생경제신문사에서 학생기자로 활동하며 식품관련 기사를 쓰기도 하고, 관심 있는 외식기업에 무작정 연락을 하여 약속을 잡고 회사에 직접 찾아가 해당 기업의 창업자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주말만이라도 책상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빨리 경험해보고 싶었던 탓이었다.
모두가 반대했다. 사회에 나가보면 후회할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매 회마다 각기 다른 나라의 음식을 식사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한식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드라마는 그 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는 매개체이기에 다문화국가인 미국의 한식세계화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한식이 세계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한인 타운의 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난 외국어가 좋았고, 책상이 싫었고(물론 이 때의 책상은 원치 않는 공부를 할 때를 의미한다), 세계의 식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이라는 우물을 벗어나 한식의 세계화 실태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꿈을 정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주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할 만큼 인생이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사춘기 소녀의 순간적인 감수성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내신 성적도, 주변의 기대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집이며 학교에 난 더 이상 4년제 대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모두가 반대했다. 사회에 나가보면 후회할거라고. 우리나라는 학력이 우선이라고.
한 고집 하는 나에게 주변의 반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티격태격 다툰 끝에 나는 간신히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요리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원하던 전문 대학교의 조리과에 진학했다. 학교생활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하고 싶었던 공부만 쏙쏙 골라서 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전공에 대한 만족감은 자연스럽게 성적에도 영향을 미쳐 대학생활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유하지 않았던 형편 때문에 해외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나는 학교에서 해외프로그램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원한 끝에 총 4번의 해외경험을 학교지원비로 다녀올 수 있었다.
나의 열정에 불을 지핀 해외경험
대학생활 2년 동안의 해외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캄보디아였다. 캄보디아의 ‘쎈쏙 초등학교’에서의 열흘간의 봉사활동은 내 미래설정에 큰 방향을 잡아주었다. 봉사는 학교건물을 페인트칠하고 학생들에게 캄보디아에 부족한 예체능 과목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함께 봉사하던 친구들과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간식을 사주기로 했다. 과자를 건넸을 때 기뻐하며 바로 과자를 먹을 줄 알았던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이들은 우리가 준 과자를 일제히 가방에 집어넣었다. 과자를 왜 먹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한 아이는 대답했다.
‘집에 가면 엄마가 있어서 엄마랑 나눠먹어야 해요.’
한창 과자를 좋아할 어린아이가 엄마랑 나누어먹겠다며 욕구를 절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한국의 아이들이었다면 그 조그만 과자를 엄마와 나눠먹겠다며 가방에 넣을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의문도 들었다. 나는 통역을 도와주던 캄보디아의 도우미 언니로부터 캄보디아의 초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정부방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침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집이 많지 않기에 아이들의 성장기 건강을 위함이란다. 캄보디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족한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에게 이 이야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열흘간의 봉사활동은 내 조리기술로 누군가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처럼 국경을 넘나들며 내 기술을 활용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요리를 하는 국경 없는 요리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해외에 나가 직접 한식세계화의 실태를 느끼고 싶었던 나는 해외취업사이트를 뒤적이며 해외에 위치한 한식당만을 지원한 끝에 가장 기대되었던 홍콩의 한 한식당에 취업하게 되었다. 매일이 행복했다. 내가 만드는 한식을 외국사람들이 먹는 것도 신기했고, 한국인 고객의 비중이 현지인에 비해 현저히 적은 레스토랑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한식의 인기도 실감할 수 있었기에 만족스럽게 근무를 했다.
한 번은 조리사 출신 사장님과 대화하던 중 아직까지는 한식이 외국인들에게는 ‘값 싼’ 음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가격대를 올리고 한식을 고급화시키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 일식은 비싼 값에 먹어도 당연시 하지만 한식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식은 조금만 가격을 올려도 금방 경쟁에서 뒤처지고 만다는 씁쓸한 이야기는 한식 세계화를 꿈꾸는 나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꿈을 향한 발돋움
나는 전공 공부에 대한 열정도 가득했기에 사이버대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였다. 실기 외에도 이론적 조리지식을 쌓기 위함이었다. 언어적으로도 실력을 늘리고 싶어서 홍콩에서 주로 사용되는 영어, 광동어 그리고 중국어도 틈틈이 공부했다. ‘국경 없는 요리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언어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언어가 되니 자연스럽게 현지사람들과 친해지기 쉬워졌고, 나는 당시 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홍콩친구 에이미와 유독 친해지게 되었다. 에이미는 자기 집에서 맛있는 것을 같이 만들어 먹자며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에이미는 한국음식 중 ‘김치전’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음식을 가르쳐 줄 기회가 생기다니 마음이 설랬다. 나는 김치전을, 에이미는 홍콩식 조리법으로 게를 요리했다. 각자 모국의 음식을 만들어 식문화를 교류할 수 있어 행복했다.
국제적인 도시 홍콩에서 1년 동안 한식조리사로 근무하면서 나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식과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식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한식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세계의 식문화에 대해서도 국적이 제각기 달랐던 동료들과의 식사를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짧지만 한편으론 길었던 해외경험을 통해 스크린으로 보는 세상과 직접 보고 경험하는 세상은 확연한 차이가 있으며 값진 경험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국경 없는 요리사, 김다희
홍콩에서의 근무를 한 달 남기고 나는 내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해외 취업사이트 ‘월드잡플러스’에 다민족국가인 싱가포르에서 경력직 한식조리사를 채용한다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화상인터뷰를 진행한 끝에 나는 홍콩 근무가 끝나고 곧바로 싱가포르에서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싱가포르에 온 지 벌써 7개월이 되었다. 홍콩에서 한식의 세계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싱가포르에서는 내 꿈을 심화시키기 위해 요리를 이용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쉬는 날에는 가끔 싱가포르의 한 봉사단체에서 주최하는 독거노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도시락 만들기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꿈꿔왔던 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늘 습관처럼 그래왔듯 나 자신에게 행복한 최면을 걸기 위해 오늘도 일기장에 적어본다. ‘나의 꿈은 요리로 봉사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배고픈 전 세계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이 한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달려 나갈 것이다. 국경 없는 요리사, 김다희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