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가장 오래된 박물관에서 최초의 외국인 디자이너로 서기까지
- 작성자
- 서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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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23
우수상 / 해외취업
뉴욕의 가장 오래된 박물관에서
최초의 외국인 디자이너로 서기까지
황지은 [미국 | 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 Museum & Library]
10년 전, 내가 관광객으로 뉴욕을 방문하던 때를 떠올리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은 그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가게에서 물 한 병 사는 것 마저 두려웠던 뉴욕이 이젠 내 작품을 실어주는 거대한 전시장이 되었다.
가끔 내가 만일 한국에 그냥 머무르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한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들이 속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과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정들이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세운 목표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10년 후엔 나는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에게 온 작은 기회조차도 소홀히 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히 살다보면 그 때는 또 어딘가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2005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는 26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지금의 나는 뉴욕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박물관의 수석 디자이너이다. 10년 동안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
한국 역사를 사랑하여 미대 시각 디자인과 재학 중에도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들고 한국의 문화유산
을 찾아 산과 바다를 누비던 내가 미국의 뉴욕 역사박물관에서 그래픽 디자인 총 책임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뒤돌아보면, 나에게 주어졌던 기회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대학을 졸업 후 예술의 전당 근무, 2년 뒤 퇴사, 뉴욕에 온지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현재 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 Museum & Library에서 인턴과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를 거쳐 수석 그래픽 디자이너로 7년 반째 근무 중인 황지은이라고 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2기 해외인턴의 기회
예술의 전당 퇴사 후 토플과 유학을 준비 하던 2005년, 우연히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제 2회 미국인턴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한 후 Washington D.C의 non-profit 단체인 International Child Art Foundation에서 그래픽 디자인 인턴으로 3개월간 일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던 추억. 그리고 협회 직원 분들이 따듯한 격려로 내 디자인의 가능성을 이야기 해주며 그들의 2006년 대회에 실제로 나의 디자인을 썼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Washington D.C의 박물관 미술관들은 나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실로암의 샘물처럼 신기하고 멋진 전시들로 매일 바쁘게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시 내용뿐만이 아니라 전시 기획 및 디자인에 있어서도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판(exhibition didactic panels)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사진 자료 및 관람객 브로슈어 등을 수집하여 훗날에는 나의 디자인 리서치 북을 완성하기도 했다.
반드시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성공하리라. 한국인 특유의 뛰어난 세밀한 예술 감각을 발휘하여 미국의 박물관에서 전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되리라. 워싱턴에서의 인턴쉽 경험은 한국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이 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만 하던 나에게 큰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 FIT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SUNY)
나는 28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었지만 워싱턴 인턴쉽을 통하여 자신감을 얻은 뒤라 망설임 없이 뉴욕FIT의 Exhibit & Display Design 2년 프로그램(현재는visual presentation and exhibition design로 명칭 변경됨)에 등록하였다.
AAS 2년제 학기 수업은 한국에서 미술대학부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며 실무에 있었던 나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학생들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현지 학생들의 인지도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언어 이해력이 다소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때는 친구들이 자신들의 노트 필기를 보여주거나 교수님들께서 따로 시간을 내어 설명을 해 주기도 하셨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어린 친구들에게 컴퓨터 그래픽 툴을 가르쳐주거나 교수님들의 개인 프로젝트를 도와드리기도 하였다.
학교 Tutoring Center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번 돈으로 용돈 및 과제비에 쓰거나 가방 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하며 부족한 생활비에 보태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했던 다짐을 절대로 어기지 않았던 것은 넉넉하지 않던 형편에 유학을 하면서도 디자인과 관련되지 않은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높은 물가와 집세 때문에 피치 못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수업까지 병행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는 신분 때문에 현금을 벌수 있는 한국인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일을 한다. 뉴욕에서는 그런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으며 나중에는 많은 이들이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한 채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되어서 자신의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뉴욕에서 거주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았다.
그 후 2007년 미국 Association for Retail Environments에서 주최하는 미국전역 학생 디자인 공모전의 visual merchandising분야에서 수상하고 2008년에는 Summa Cum Laude(최우수 졸업생)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졸업 과제나 논문 평가 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뛰어난 후배들을 인턴으로 박물관으로 영입하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박물관에서 설립 최초로 취업 비자 스폰서를 받은 한국인
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는 뉴욕 맨하튼 Upper West Side에 위치하며 1804년 개관한 뉴욕 최초의 박물관이다. 미국의 역사와 관련된 귀중한 많은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Tiffany Lamp, Audubon, Hudson River School 컬렉션부터 9.11 테러 현장 보존품까지 방대한 뉴욕 역사의 저장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내가 인턴으로 발을 디딘 2008년에는 역사 깊은 박물관답게 그 어떤 기관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성과 같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박물관에서 나는 인턴쉽 과정 3개월, Optional Practice Training Period 1년 후 최초로 비자 스폰서를 받은 외국인 근로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점은 그들에게는 번거로운 취업 스폰서를 해주어야 할 만큼 내가 박물관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굳이 신분의 제약이 있는 외국인 근로자보다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많은 현지인들을 채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까지
내가 인턴을 거쳐 어시스턴트 디자이너 그리고 그래픽 총괄이 되기까지 나에게 회사는 마치 우리 집과도 같았다. 박물관에서 주말에도 늘 사무실에 출근하는 직원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뉴욕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 기관인 만큼 그들이 구사하는 수준 높은 영어는 나에게 가장 힘든 부분이었기도 했기에 언어로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남들보다 늘 2-3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늘 2-3배의 디자인 시안을 제시하여 내가 가진 단점을 극복해 보이려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신소재를 조사하여 전시 설치 분야에서도 쉽고 경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주말에는 늘 다른 박물관이나 트레이드 쇼 등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였고 기회가 되는 대로 거래 업체들과 친밀하게 연락을 하여 그들에게서 새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절약하게 된 전시비용을 눈에 보이는 수치로 계산하여 나의 인사평가 노트에 첨부하기도 하였다.
미국 기업문화는 실리적이기에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인 고유의 근성이 이곳에서 의도치 않게 굉장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미국인들에게 나만의 방식대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일적으로는 철두철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직원들의 생일파티나 경조사에 늘 내가 손수 디자인한 카드를 사람들에게 돌리며 축하 메시지를 전해주거나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직원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준다던가 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일적으로는 정확하고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인턴으로 입사 3년 만에 그래픽 디자인 부서 총괄로 승진
2010년, 인턴으로 입사한지 3년 만에 나는 헤드 그래픽 디자이너로 승진이 되었다. 그 이후에 박물관의 2011년 70억 예산의 대대적인 레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 리드 디자이너로, 그 외에 매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주요 역사 전시회에서 그래픽 디자인팀을 지휘하며 박물관의 교육팀, 홍보팀, 발전부서팀에 스타일 가이드라인을 배포하여 각종 홍보물 및 교육 자료물들을 제작 지휘하였다.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발전 기금마련 행사나 정부 기금 제안서에도 깊숙이 관련하여 여러 부서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노력하였다. 이제는 내가 디자인한 전시의 홍보물이 뉴욕의 지하철이나 신문에 크게 실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보람된 일과가 되었다.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긴 대화를 이어가지 못해 예스만 하던, YES GIRL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내가 이젠 거래 업체나 협력 단체들에게 내 의견을 정확히 피력하고 5명의 미국인 어시스트 디자이너와 2명의 인턴을 가르치며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의 과거를 회상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져 보인다.
나는 지난 201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중국이민자 역사전, 아모리쇼 100, 컴퓨터 역사전 등 박물관의 메이저급 전시를 리드했고 내년에 열리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전시를 준비 중에 있다. 각각 1-2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한 대형 전시부터 내일 당장 인쇄소에 넘겨야 하는 기금 마련 브로슈어까지 내 손을 기다리는 많은 일들 때문에 나의 뉴욕에서의 삶은 일 분 일 초가 소중하고 바쁘게 되었다.
10년 전, 내가 관광객으로 뉴욕을 방문하던 때를 떠올리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은 그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가게에서 물 한 병 사는 것 마저 두려웠던 뉴욕이 이젠 내 작품을 실어주는 거대한 전시장이 되었다.
가끔 내가 만일 한국에 그냥 머무르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한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들이 속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과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
다고 생각했던 과정들이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세운 목표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10년 후엔 나는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에게 온 작은 기회조차도 소홀히 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히 살다보면 그 때는 또 어딘가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